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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2)|제71화 경기80년(50)<제자=필자>-교육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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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교육혁명의 해로 불리는 l968년에 문교부는 중학교 무시험진학과 학군제실시를 단행했다. 이 급격한 정책의 전환은 교육위기에 대한 사회의 여론이 결정에 이르러 과감한 수술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과열 과외수업의 부작용은 급기야 이 같은 교육혁명을 야기시킨 것이다.
문교부는 69년7월15일 국민교육의 정상화 안으로서 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여 학교군제를 실시해서 추첨입학제도를 단행한다는 최종 결정 내렸다.
이와 함께 1차로 14개 공·사립 중학교의 폐교를 단행하여, 그 시절을 고등학교에 전용키로 했고, 대상 14개 중학교 중에서도 경기·경복·서울·경기여고·이화여고 등 5개 학교를 69학년도에 1차로 폐쇄했다.
그리고 69년말 문교부는 고교진학에 있어 동일 구내 중학교의 경우 동계 고등학교에 대한 무시험 진학을 시키는 특전을 주기로 결정하여, 경기중도 71년도 3학년이 졸업하여 경기고에 진학함으로써 정식으로 폐교됐다.
대통령의 3선 출마를 가능케 한 소위 9·14개헌안이 제기된 69년8월 중순부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문교부는 학교장 책임 하에 학생들의 소란을 막으라고 지시했으나, 3선 개헌반대파동은 경기에도 불어와 교내에서 성토대회가 일어나고 「데모」가 벌어졌다. 학교당국은 9월16일부터 17일간에 걸쳐 고2, 3학년에 휴업조치를 취했으나,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이성조 교장과 김학준 교감은 9월20일 직위해제를 당했다.
문교부는 이 날자로 서울시교육위원회 박원익 학무국장을 재30대 교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박 교장은 소의 「부정편입사건」에 관련되어 재직77일 만인 69년12월5일 물러나게 되어 「최 단명 교장재임기록」을 남기는 비운을 겪었다.
개헌반대 바람으로 혼란이 일어난 학교를 수습, 안정시키고자 부임한 박교장은 1인당 5백만원씩을 받고 학력을 위조한 2명을 중학교에 편입시켰다고 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박 교장은 편입은 정식 증명서류에 의해 소정의 편입시험을 치러 하자는 없으며, 찬조금은 개교 70주년 기념사업과 불가피한 학교 경비에 충당했다고 밝혔다.
박 교장이 해임 된지 1주일만에 12월11일 이창갑 교감이 교장직무대리로 취임했다. 이어 「크리스마스·이브」인12월24일 문교부는 제31대 교장에 나를 임명했다. 실로 8년만에 모교에 교장으로 「컴백」하게 된 나로선 남다른 감회가 깊었다. 나는 4·19후인 61년3월31일에「한 학교에 10년 이상 근무한 교사들은 다른 학교로 전임시킨다」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13년만에 경복고로 옮겨갔다.
64년3월엔 덕수중 교감으로 영전된 뒤 1년 후인 64년3월 서울시 교육위원회 중등교육 과장으로 옮겼는데, 이때 「무우즙파동」이 일어나 법원과 국회문공위원회를 뛰어다니며 사태수습을 위해 애를 먹는 등 경기와의 인연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다 무즙파동에 이은 경기중 뒷문입학이 말썽을 빚어 나 역시 65년6월 직위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작년 6월에 다시 서울시 시청각 교육원장으로 복직되었다가 68년2월에 문교부 장학관으로 임명됐다.
나는 경기와는 인연이 깊었던지 장학관 시절인 69년7월15일에 권오병 문교부장관의 용단에 의해 무시험진학과 학군제가 실시됨으로써 경기중학의 폐교를 보게된 것이다. 이런 곡절을 겪고 이해 12월24일 드디어 경기교장으로 부임한 것인데 자리에 앉기도 건에 또다시 송사에 부딪쳐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것은 전임 박원익 교장 때 야기된 부정편입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자 이 학생들의 학부형들이 「입학허가 취소 무효」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법원에 불려다니는 등 부임과 함께 고생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듬해 70년에 들어 안정을 되찾으면서 개교 7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수 있게된 것은 다행이었다. 10월3일 개교 기념일을 맞아 천문대와 「플라네타룸」(성좌투영기)을 완성함으로써 경기는 명실공히 동양 제1의 학교과학관을 갖출 수 있게 됐다. <계속> 【서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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