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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인터뷰 김수환 추기경|시련없인 인간심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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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파와 차량행렬을 해 집고 들어선 명동성당은 흡사 도회의 섬 같다. 훨씬 크고 높은「빌딩」들이 전보다 훨씬 잡다하게 들어선 명동. 그래도「고딕」식 붉은 벽돌집 명동성당의 십자가는 아직 높아 보인다.
『어서 오세요. 방이 약간 춥습니다.』천주교 서울대교구청 2층. 추기경 집무실은 고 물가시대에 기름을 줄여 때느라고 약간 썰렁한 느낌이다.
동쪽 끝에 집무책상이 놓여있고 남쪽 벽에 대(죽)를 그린 동양화가 2폭. 장방형의 추기경 집무실은 지나치게 평범한 것이 오히려 색다르다. 「로만·칼러」(신부복)차림의 추기경은 7∼8평 가량 되는 그 방 한가운데쯤에 자리잡은 응접석으로 조용히 와 앉는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괜찮은 편입니다. 바쁜 때라 좀 무리를 했던지 그만 감기란 놈이 덤벼서….』
빙그레 웃는 얼굴을 남향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볕이 감싼다.
58세의 나이 탓일까, 전 보다 많이 늘어난 흰 머리칼이 돋보였으나 따스한 얼굴이다.

<흑자 간절했던 한해>
밤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만큼 바쁜 일과라 병원에도 못 가고 있지만(치통이 심하다고 했다)정작 본인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안 나는 게 더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올해는 국내외로「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해를 어떻게, 성격 지을 수 있을까요?(말문을 열기 전에 우선 쑥으로 만들었다는 담배를 한대 권하며 불을 붙여준다.)
『1980년은 한마디로「적자의 해」였다고 봅니다. 국내외에서 많은 기업들이 적자률 봤다고 들었습니다만 특히 가치면에서 적자를 낸 한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흑자가 더욱 간절했던 한해이기도 하고요….』(김 추기경은 언론은 어떠했느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했다)
-유류 파동 등 세계적인 경제사정의 악화와 소련의「아프가니스탄」침공 등 정치적 불행으로 해서 항간에는「하나님은 죽었다」느니「하나님은 어느 편이냐」하는 이야기가 나들고 있다는데….
『글쎄요 그게… (질문이 좀 당돌했는지 잠시 쉬었다가)금년에 제가 아끼던 젊은 신부 한 명이 신부전증으로 앓던 중 합병증으로 실명까지 하는 고통을 겪다가 죽었어요. 죽기 전에 저를 만나더니 자기는 실명 후 남의 안내 없이는 한 걸음도 못 걷는 처지가 됐으나「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자기 삶의 길임을 실감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육신의 눈은 어두워졌어도 마음의 눈은 오히려 열린 겁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길」을 그는 본 거죠(담배를 한대 태워 물며) 정의보다 불의가 이기고 정의로운 사람이 오히려 희생당할 때「신은 어디 있는가」「신은 과연 정의편인가」하고 의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아까 적자이기 때문에 흑자가 간절했다고 말했듯이 시련과 고뇌를 겪기 때문에 하나님과 보다 깊은 의미의「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꼭 종교인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시련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인간심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시련을 통해 인간의 삶 자체가 깊어지고 그런 체험을 통해 이웃을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좌절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계십니다. 두드리면 열리는 겁니까?
『그렇죠. 빛을 찾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빛이 외부에서 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빚을 내부에서 찾아내고 또 밝혀야 됩니다. 자신이 문제와 부딪쳐가면서 빚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마음도 밝아집니다.
(기침을 자주 하면서도 추기경의 두 손은 어느새 앞으로 모아져 있다.)
-성탄「메시지」에서「우리는 사랑할 능력을 잃었다」고 지적하셨는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방금도 말했습니다만 인간이 자기자신내부에서 자기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외적인 가치·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데서 연유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기주의에 물들고 자기중심이 돼 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자기를 주는데 있습니다. 정말로 자기를 주며 사랑하는데 인간의 존재목적이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가치가 충족되고 행복해지는데 이것을 잊어가면서 받는데서만 행복을 찾으려하는 겁니다. 받고 얻고 차지하는데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교회에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닙니까?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도대체 교회자체가 자기 입으로 설교하는 사랑을 삶을 통해 보여주느냐고 물을 때 아주 큰(크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의문이 뒤따릅니다. 이 나라에 철탑이 안 보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많은데, 그리고 그 무수한 교회가 모두 사랑을 설교하는데, 교회가 설교하는 모든 정신적 가치와 사랑이 과연 한국사회를 풍요하게 했느냐는 겁니다. 그 문제를 놓고 우리교회도 크게 각성을 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탄「메시지」에 관해서 한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정의처럼 행세한다」고 하셨는데 교회가 생각하는 불의와 거짓은 어떤 겁니까?

<교회도 각성해야>
『계속 그렇게 성탄「메시지」만 물고 늘어지깁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이다)민심은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양심상 공통된 것을 전제하고 한 이야깁니다. 그 공통된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죠. 교회의 정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면 정의롭게 사는 건 어떤 것이냐….
(한참 창 밖을 바라보다가)쉽게 말할 수는 없겠죠. 이 어려운 때 처자를 거느린 사람이 현실의 한복판에서 부딪쳐야하는 문제를 저 같은 사람, 어떤 의미에서는 생활도 보장돼 있는 저 같은 사람은 짐작은 해도 완전히 이해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납니다.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이 존엄성과 자유는 법률이 주어서 갖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절망적인 상태라고 보여지는 교도소의 사형수나 무기징역 수 가운데서도 마음속으로는 어느 누구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경우를 저는 가끔 봅니다. 반대로 법률적으로는 분명히 자유도 있고 돈·명예·지위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은 완전히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는「노예같은 사람」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자유는 결국 근본적으로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선택의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선인 줄 알고 선택했을 경우 또 악을 악인 줄 안 뒤에도 계속 선택했을 경우, 그 사람은 계속해서자유를 잃다가 결국 노예가 될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는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반면에 그 사람이 선을 선택했을 경우 한 때의 어려움은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자유롭고 인간다와지고 풍요로와질 것입니다. 자유롭게 자유를 찾아가면서 사는 삶이야말로 바로 정의로운 삶이죠.
-추기경께서 가장 정의롭게 산 사람을 든다면‥.
『그야「예수·그리스도」죠.』
-죄송합니다. 우문을 드려… (웃음)종교의 현실참여는 어느 선까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한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할 때 종교가 정치자체에 직접 참여하거나 정부에 아무개를 무슨 장관에 앉혀라 하는 식의 참여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모든 사람과 삶을 함께 하는 게 종교인이라고 볼 때는 종교의 현실참여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정신은 사람이고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사람의 요구」때문에 현실참여에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현실참여 이야기가 나오면서 생각나는 것-.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공산주의와는 상극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득 교황의 출신국인「폴란드」의 경우가 궁금해졌다.)
-「폴란드」의 성직자들이 공산정권에 협조하고 있는 건 무슨 이유이고 또 어떻게 보십니까?
『「폴란드」성직자들이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노조파업 같은 것으로 해서 만일의 경우 소련이 개입해 들어온다면「폴란드」국민들은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되고, 바로 이런 불행을 미리 막기 위해 성직자들이 노조 측에 자제를 호소하기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자유를 찾기 위해「폴란드」성직자들은 오히려 희생하고 있는 겁니다. 참된 반공 아니겠습니까?』
「「가톨릭」은 예외였습니다만, 최근 종교정화의 회오리가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같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신문 제목만 훑어봐>
『자체에서 했어야할 겁니다. 물론 아무리 종교인이라고 해도 범죄를 구성했다면 문제는 다르죠. 그러나 어떤 힘-가령「외부압력」이 종교를 정화하겠다고 나선다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정화냐, 또는 종교 고유영역에 대한 침해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고 이 경우 자칫 종교기능의 마비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서울교구의 대주교로, 또 전세계에 1백30명밖에 없는 추기경의 한사람으로 몹시 바쁜 한해였지만 김 추기경은 내년에도 바쁠 것이다.)
『내년은 특히 서울교구 창립 1백50주년이 되는 햅니다. 단순한 기념에 끝나지 않는 뜻깊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또 오는 84년은 교황 2백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일도 대비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같습니다.』
-TV는 더러 보십니까?
『전에는 가끔 봤지만 요즘은 시간도 없고 해서 별로 안보는 편입니다. 이따금 AFKN을 트는 정도죠.』
(최근에 본 TV「프로」중에서 특히 인상에 남은「프로」를 묻자, 김 추기경은 뜻밖에도「야, 곰례야」를『아주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
-신문은….
『요즘은 주로 제목만 훑어봅니다. 그러나 문화면은 비교적 자세히 보면서 뭐가 있나하고 찾아보죠. 그리고 그 바둑란. 사실 저는 바둑돌 한번 쥐어보지 않은 무급이면서 바둑해설은 꼭 읽어봅니다. 쭉 번호를 따라가 보고는 해설을 읽어보고…. 분명히 거기에는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말 뜻밖이다. 분명 바둑 실력은「백지」라고 강조하면서 웃는 그에게「자칭2급」실력의 기자로서 바둑얘기를 더하고 싶었지만 김 추기경에겐 다음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자리를 뜨기 아쉽다.) 김「스테파노」수환 추기경. 그는 무한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사람을 빨아들이는「사람」이다. <대담=오홍근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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