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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사는 게 왜 이리 비루해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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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문재 시인은 주간지 시사저널 기자, 문학전문 출판사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지냈다. 요즘에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쓴다. 시인은 가장 닮고 싶고, 미래에 갖고 싶은 직업으로 정원사를 들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문재 시인(55)과 탁구를 쳐본 사람들은 승패 없는 게임의 묘미를 배운다. 공이 왔다 갔다 하는 랠리를 오래 지속하는 것이 ‘이문재 표 탁구’의 승부처다. 상대방이 잘 받아넘길 수 있도록 좋은 공을 배려하는 감각이 실력이 된다. 우애와 환대의 탁구다. 두 사람이 친 공의 수를 더해 점수를 내니 둘은 끈끈해진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시인은 손에서 본다. “손이 하는 일은/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오른손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손은 손을 찾는다’)

 그는 10년 만에 펴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에 시와 시인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털어놨다. 그는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라 했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시급한 과제인데 시는 그 감점(感點)을 발육시키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급속하게 공멸하는 사회에서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떠올리면 시의 위치는 더욱 작아지죠. 저는 역설로 문명이 어디로 가야하는가 같은 더 큰 그림을 시가 그려야 한다고 봅니다. 몽상이라 해도 좋아요. 꿈꾸며 사는 것은 광장에 나가 외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구적 상상력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적 감수성이 커져야 삶이 제대로 굴러갑니다.”

 시인은 1991년 창간한 ‘녹색평론’의 정신을 지지한다. 이 잡지가 내세운 생태론의 네 가지 가치, 상호연관성·순환성·총체성·지속성을 시로 읊는다. 그에게 시인은 심오한 생태론자이다. “천국에도 있고 지옥에도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인간과 방사능 물질이다.”(‘천국의 묵시록’)

 “한때는 저도 늘그막에 도시의 삶을 청산하고 시골로 들어가겠다고 마음 먹었죠. 지금은 도시를 떠날 수 없다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대안은 도시를 시골로 만드는 겁니다. 흙이 있는 공유지를 도시 곳곳에 늘려 가면 그 땅을 중심으로 텃밭이 생기고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은 땅과의 유기적 관계를 회복해 새로운 문명을 일굴 수 있습니다. 도시의 미래는 이 ‘1차 장소’를 생생하게 느끼는 장소감(場所感)을 되살리는데 달려있어요.”

 돈이 되지 않아 자본주의로부터 버림받은 시를 이 나이 되도록 붙들고 있는 것이 그는 가슴에 사무친다고 했다. 자본주의로부터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영혼이 시이기에 시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이 시대에 그는 특히 비루해진 죽음의 존엄성 회복이 시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집이/ 집에 없다/ 집이 집을 나갔다//그러는 사이/ 죽음이 집을 나갔다/ 죽음이 도처에서 저 혼자 죽어가기 시작했다.” (‘집이 집에 없다’)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그 사회가 급속히 자멸하고 있다는 징후다. 시인은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라고 했다.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이라는 세계감을 되살릴 수 있도록 그는 더 통 큰 시를 쓰고, 광대무변한 삶의 시인이 되려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어떤 경우’)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문재=1959년 경기 김포 출생. 82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 등. 지훈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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