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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박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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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풍한 세상에 청신한 바람처럼 살다가는 사람들이 때때로 있다. 이영춘 박사의 생애가 그런 경우다. 반세기를 두고, 농촌에 묻혀 의료봉사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77년의 희수. 그는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온통 봉사와 겸손으로 충만하게 했다.
혹 낯선 이름일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보람과 신념에만 일관하며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까것 명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 박사는 1929년「세브란스」의전을 나와 일본「교오또」(경도)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세인들은 한국인 교수의 지도로 일제 치하에서 학위를 받은 최초의 경사라고 평판이 높았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그 길로 전북 옥구군의 한 한촌으로 갔다. 자혜 진료소에서 빈곤과 무지와 적막 속에서 병고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진료소는 어떤 일본인 지주가 소작인들을 위해 세운 것이었지만, 이 박사는『같은 겨레를 위한 봉사』에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았다.
그에겐 민족적 울분이나 통한이 곧「소리없는 봉사」로 나타난 것이다. 호남 평야, 일망무제의 벌판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았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자혜진료소는 이 박사의 몫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인의 뜻도 그랬었다. 그러나 끝내 마다하고 그는 재단 법인으로 만들어 농촌 위생 연구소를 설치했다. 이것이 오늘엔 농촌 위생원이 되었다. 그동안 개척자로서의 열의와 연구의 축적으로 이룩된 보람이었다.
빈곤과 무지속엔 으례 병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결핵과 기생충이다. 이 박사는 바로 여기에 착안해 연구와 계몽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농촌 가운데 태·유아의 사망율이 가장 낮은 곳은 개정면이다. 바로 이 박사의 본거지가 이곳이다. 모자 보건사업의 결실이었다. 보육원·영아원도 그가 즐겨 해온 사업들이다.
그의 고향은 호남과는 아득히 먼 평남 용강. 그에겐 무슨 야심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있었다면 야심 아닌 신념 그것뿐이었다.
망국의 허탈속에서 어둠속에 묻혀 있는 농촌을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은 낭만이나 감상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오늘 그에게 남은 것은 단란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분토도, 저택도 없는 허허실실-. 그는「바치는 삶」을 살았을 뿐, 미련도 집착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그의 부음을 들으며 새삼「생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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