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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1)|제71화 경기80년(19)|제일고보 입학①-유홍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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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형자리. 지금은 갈수 없는 곳이 돼버린, 오늘의 판문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원래 우리 집안은 서울을 근거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았던 문화 유씨 선비 집안이었는데, 5대조 때 장단으로 낙향, 그후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엄격한 선비였던 선친의 영향으로 우리 형제들은 철이 들면서부터 이웃 서당에 나가 한문공부를 했는데 나도 형님과 함께 일찍부터 서당에 나가 『소학』과 『통감』등을 배웠다.
내 나이 여덟살때 3·1운동이 일어나 우리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다 일인 순사들에게 붙잡혀가거나 다쳤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3·1만세는 l919년 내내 계속됐다. 그런데 그해 어느날 선친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이제 더 이상 서당에 가지 말고 학교에 가라』시며 우리 형제들을 장단 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마도 선친께서는 이제부터는 자식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시켜 새로운 세계에 살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장단학교시절 우리 형제들은 학교공부에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여 학업성적은 언제나 최우등이었다. 그래서 학교는 물론 동네 사람들은 유아무개 형제 하면 공부 잘하는 집 애들로 생각케 됐고, 그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한테서도 남달리 귀염을 받았다.
l925년 보통학교 졸업 무렵 우리형제는 상급학교만은 서울로 진출할 생각으로, 당시 조선 13도의 수재들의 선망의 적이었던 경성제일고보에 감히 원서를 냈다.
당시 제일고보는 명실공히 조선 제일의 학교로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종전에 실시되던 추천에 의한 무시험 입학제도도 폐지 완전경쟁 시험제를 채택하고 있어, 장단 같은 시골학교 출신으로선 좀체 입학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가 입학하던 25년 당시만 해도 2백26명 모집에 수재급학생 8백36명이 지원해 4대l에 가까운 경쟁을 벌였는데, 장단학교에서 우리 형제를 포함해 모두 4명의 합격자를 내 우리 학교는 물론 군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의 화제가 됐다.
우리 학교는 『그 어려운 제1고보에 4명씩이나 합격시켰다』하여 큰 잔치를 벌였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집안은 형제가 나란히 합격해 더욱 큰 화제가 됨으로써 선친과 가족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입학하던 25년은 제일고보가 관립에서 공립으로 바뀐 해였는데, 3·1운동이후「일도일교 설치」방침에 따라 각 도에 1개 이상의 고등보통학교가 설치됨으로써 제일고보도 종전의 총독부관리에서 도 관리로 넘어가게 됐다.
이때 제일고보는 그때까지 부실로 되어있던 보통학교 교원양성을 위한 부속 사범과도 경성사범으로 이관시킴으로써 「순수 인문교」로 재출발하던 때였다.
입학식은 그해 4월l일에 행해졌는데, 그때까지 입고 있던 한복 두루마기와 검정 고무신을 벗어 던지고, 난생처음 산뜻한 양복차림에 반짝거리는 검정구두, 그리고 백선에 높을 고자를 단 교모를 쓴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 했다.
당시 교장은 바로 전해에 부임한 「시게다」선생이었는데, 머리는 항상 기름칠을 해서 반듯이 빗고 옷매무새가 매우 단정한 사람으로, 부임 전에 총독부 사무관겸 신학관으로 오래 근무해 일인교육자들 사이에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교사진 가운데는 수학에 이관섭, 한문에 이윤희, 국어(조선어)에 정성근, 영어에 이주연 선생 등 한인교사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윤희 선생은 관립한성 고교시절부터 26년간을 경기에만 계신 분으로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차림인 단아한 인품의 선비였다.
이관섭 선생은 해방 후 경기교장을 지낸 분인데 나를 특히 귀여워해 한번은 내게 중매를 서주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이를 거절하느라 곤욕(?)을 치렀던 일이 기억난다.
내가 경기에 다닌 25년부터 29년까지 5년간은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사건 등 큰 사건으로 점철된 시기여서 재학중 탈락자들이 많아서(2백26명 입학에 1백5명 졸업)교우에 있어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문종건(전 조흥은행장) 권성기(전 국회의원) 김갑수(전대법관) 박병구(화신무역사장)등이 퍽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다.
이제 모두 70이 넘은 노인들이 됐지만 우리 동창들은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씩 한자리에 모여 옛날 화동 언덕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곤 해왔다.
아물아물한 기억들 가운데서도 친구간에 서로 의기투합, 국적 있는 교육을 내걸고 학교당국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벌이던 일, 꿈에 부풀었던 금강산 수학여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다사다난했던 학창생활 속에서도 면학의 염을 불태우던 일들이 반세기도 넘게 지난 오늘에 와서 생각할 때 정말 감개가 무량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계속>

<저자소개>오늘부터 유홍렬 박사가 집필
정구충 박사에 이어 오늘부터 『경기80년』의 집필을 맡은 유홍렬 박사는 우리나라 사학계, 특히 국사분야에서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원로학자다.
1911년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유 박사는 1925년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해 30년에 졸업(경기26회)했으며 이어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전공했다.
35년 성대졸업 후 성대조교·동성상업교사를 거쳐 45년부터 66년까지 20여년간 서울대 교수·총장직무대리를 역임했다. 그후 대구대학장·성균관대교수·동 대학원장을 거쳐 현재는 인하대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한국근대화의 여명』『한국천주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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