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엽기적인 2014년 한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

‘엽기적인, 너무나 엽기적인’.

 엽기(獵奇)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엉뚱하거나 황당하고 괴이한 상황을 뜻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의 불후의 철학서 저자이자 시인인 니체가 요즘 한국 사회를 본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나도 비정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사건들이 줄줄이 발생하고 있어서다. 현직 서울시의원의 ‘3000억대 재력가 살인교사 혐의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 ‘경기도 포천 고무통 변사 사건’이 귀를 의심하게 했다. 살인 주체, 동기, 수법이 엽기 그 자체였다. 두 사건 수사 와중에 경기도 연천 28사단 윤모(20) 일병 구타 사망, 김해 지역 여고생 윤모(15)양 구타 사망 사건이 재부각됐다. 뒤늦게 공소장 내용이 공개되면서다. 여기다 7일에는 부모를 살해한 뒤 방한용 에어캡(일명 ‘뽁뽁이’)에 싸 뒀다가 경찰이 다가오자 시신에 불을 지른 30대 남성 박모씨의 엽기 행각도 드러났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도시나 군대 속의 ‘섬’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타인의 눈길, 공권력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고립된 공간 말이다.

 ‘엽기적인 그녀들’이 그랬다. 부산·대구 등의 섬에 갇힌 여고생 윤양은 죽기 직전까지 성매매, 토사물 핥기, 전신에 끓는 물 붓기 등의 괴롭힘을 당했다. 죽어서 얼굴은 불에 그슬려졌고 시신엔 시멘트 반죽이 뿌려졌다. 용의자 7명 중 4명은 여중생이었다. 고무통 변사 사건 피의자인 50대 여성도 엽기다. 고무통 속엔 부패한 시신 2구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녀는 “고무통 아래 시신은 10년 전 죽은 남편”이라고 횡설수설했다. 2구의 시신에선 수면제도 검출됐다.

 엽기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대한민국 군이다. 신병 윤 일병은 대답이 느리다는 등의 이유로 집단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하다 기도가 막혀 숨졌다. 드러누운 상태에서 입에 1.5L 물 붓기, 성기에 안티푸라민 바르기, 가래침 핥아 먹게 하기, 치약 먹이기 등 악랄한 고문의 끝이었다. 윤 일병이 숨진 건 지난 4월 7일. 윤양이 숨진 건 4월 10일. 각각 부대 배치를 받은 지 1개월 남짓, 꿈 많은 여고생이 된 지 1개월 남짓 됐을 때였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재앙의 그늘에 가려, 전 국민적 우울모드에 눌려 어처구니없는 두 젊은이의 죽음은 묻혀 있었다. 군은 알고도 숨겼다. 부모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엔 엽기 열풍이 불었다. 아기 얼굴을 한 귀엽고 엽기적인 성격의 토끼인 ‘마시마로(Mashimaro)’ 캐릭터가 등장했다. ‘엽기 토끼’로 불린 마시마로 인형은 길거리 좌판을 휩쓸었다.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한 ‘엽기적인 그녀’(2001년 개봉)도 흥행 대박을 쳤다. 당시 엽기라는 말 속에는 ‘기발함으로 금기를 깬다’는 진화된 의미가 담겼다. ‘엽기의 반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전이 도로 반전된 듯하다. 기발함은 없고 기괴함만 넘친다. 우리 삶의 터전이 엽기 사회, 엽기 공화국처럼 돼 버린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