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 친구] 아랫사람에도 깍듯한 노신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1653년 네덜란드 선원 헨드리크 하멜이 탄 배가 제주도 근처에서 난파한 지 올해로 3백50년이 됐다. 하멜은 13년간의 한국 생활을 적은 '하멜 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서양에 소개했다.

내가 2001년 8월 네덜란드투자진흥청 대표로 한국에 왔을 때 하멜이 유럽에 조선을 알렸듯이 한국을 내게 가르쳐준 노신사가 있다. 바로 네덜란드투자진흥청 권영복(權寧福.(左)) 명예고문이다. 權고문은 슬하에 둔 3남 1녀를 의사.교수.법조인 등으로 키웠고, 현재 대학생 손녀를 둔 79세 할아버지다.

나는 지금도 그의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 깍듯한 예절과 아랫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5세에 불과한 내가 그를 친구로 소개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란 나이보다 서로를 얼마나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1987년부터 지난해까지 네덜란드투자진흥청 한국사무소에서 고문으로 일했다. 지난해 말 퇴임한 뒤에도 종종 내게 한국의 경제 상황과 기업들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사가 74년 한국에 세운 한국필립스에서 15년간 부사장으로 일했던 그는 한국-네덜란드의 경제교류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다.

지난해 월드컵축구대회는 그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가 맡은 한국팀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함께 환호했다.

특히 대회가 끝난 후 한국에서 불붙은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은 한국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는 일을 하는 나에겐 큰 힘이 됐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크고 작은 시련을 딛고 단기간에 경제부흥을 일궈낸 국가다. 이런 한국의 불행했던 현대사는 평소 權고문이 들려준 그의 삶에서도 엿보인다.

2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45년 8월 15일 일본군 소집영장을 받았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교편을 잡은 덕분에 영장이 동년배보다 좀 늦게 나왔던 것이다.

"친구들은 학도병으로 끌려가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하거나, 유골로 돌아왔어요. 나에게 영장이 조금만 일찍 나왔어도 중국.동남아 등지로 끌려가 역사의 희생물이 됐을 것인데…. 나 혼자 살아 남았다는 미안함 때문에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權씨)

운 좋게 일본군 소집을 피했지만 한국전쟁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다고 했다.

"해방 직후 지방에 있는 미국공보원에서 일하다가 업무상 서울을 찾았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죠. 당시 가족들은 내 신분 때문에 피신해야 했고, 집에는 '역산(逆産) 제7호' 라는 딱지가 내붙었지요. 곧바로 청주로 걸어내려가 일주일간 친구 집 장롱 뒤에 숨어지내야 했죠."(權씨)

위기를 넘긴 후 그는 한국군 1사단 15연대에 배속돼 번역.통역 등을 맡았다. 그의 부대는 서울 수복 후 가장 먼저 평양에 진격했다고 한다. 또 당시 평양 인근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시체들에 대한 기억은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렇듯 그가 걸어온 길을 들을 때면 살아있는 역사책을 보는 듯 생생하게 한국을 느낄 수 있다.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분단 현실에 대해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멜이 이 땅에 왔을 때 조선은 외부 세계와의 교류.협력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그 결과는 이미 한국의 근대사가 대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핵 위기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들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나는 權고문처럼 지혜로운 한국인들이 이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정리=하재식, 사진=김춘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