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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도전 본사창간15주년기념 특별기획 국내외석학 100인의 「그룹인터뷰」(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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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역사상 국세가 가장 융성하고 문화가 찬란했던 시대는 신라1천3백년이었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자리한 신라는 원래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면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오히려 여·제를 격파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우선 국방에 강해 일본 세력은 발붙일 곳이 없었으며. 외교에 능해 주변의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미 6세기초에 접어들어 경주에 동· 서·남 시가 열렸던 것으로 보아 상업도 번창했던 것 같다.
문성왕 때에는 장보고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 청해진을 설치하고 한때 신라는 해상권을 독점하기도 했다.
사명감 갖고 사회 이끌어
신라가 이처럼 융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국사학자 이선근 박사는 화랑제도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화랑제도는 무려 1백80년에 걸쳐 활기에 넘친 인재들을 끊임없이 배출했으며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사명감을 갖고 그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 갔다.
화랑도는 신라의 「에너지」이며 지주이기도 했다. 신라의 전성기와 삼국통일기가 화랑도정신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화랑도의 기원은 문헌상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37년(576년)에 처음으로 화랑도가 왕명에 의해 국가단체가 되었다. 인재를 발굴하는 제도로 채택된 것이다.
그 무렵 군신이 인재를 널리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화랑제도를 통해 문호를 개방하고 무리를 모아 함께 교유를 하게 만들고 그 행의를 살펴 인재를 등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준수한 남녀를 가려 이들에게 도의를 연마시키며 가락을 즐기게 하고 명산·대천을 찾게 해 호기를 북돋워 나라의 필요한 인재로 양성했다.
화랑은 흔히 무사집단으로서 상무정신의 고취에만 힘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원광법사와 같은 고증의 가르침(속세오계)을 따랐던 것을 보면 인격수양과 도의연마의 비중도 결코 작지 않았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화랑제도를 통해『사람의 정사를 분별하고 선자를 가려 조정에 천거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있다.
옛 문헌에는 화랑의 자격을『15∼18세의 왕족』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미시랑 (미시랑)과 같이 거리를 방황하던 무명의 고아가 국선에까지 추대되었던 예도 있었다. 이선근 박사는 『남녀의 성별은 물론 문벌과 계급을 초월해 오로지 인물과 자질을 표준으로 했었다』고 말한다.
신라의 이와 같은 인재존중의 제도는 역사의 한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재를 기르고, 또 그들을 널리 확보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결국 사회의 기골도 약해진다.
우리는 가까운 역사에서 뼈아픈 경험들을 쌓고 있다.
선조 (조선조14대왕· 재위1568∼1608)말엽 우리는 비로소 서양이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나라인지를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는 듯 싶더니 왜란을 만났다.
이미 일본은 서양문물에도 눈을 뜨고 세계를 향해 발돋움을 시각 할 무렵이었다.
무려 7년이나 계속된 국난 중에 일본은 다수의 우리 백성을 포로로 삼았으며 그 중에는 노예로 매매를 한 예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기술자들이 일본에 끌려간 것도 이때였다. 훗날에 이들은 일본도예문화의 기틀이 되었다.
이런 난리를 겪는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적 파탄은 물론이고 관료기구도 부패해 임난 이후에는 어느 한구석에서도 인재가 배출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역시 일제36년은 우리에게 인재를 배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가까이 3·1운동이후 이른바「조선총독부」의 한국인 관리임용은 그 수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터무니없는 과장에 불과했다.
거듭된 변란에 인재 잃어
1931년 총독부내의 한국인 간부는 사무관1명, 동관 13명밖에 안되었다. 총수 7백7명 가운데 13명은 1백명에 2명 정도의 비율이다. 이것이 한국을 다스리는「조선총독부」의 구성이었다.
8·15해방과 함께 조국은 비로소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헌국회가 채택한「반민특위」의 활동을 통해 그나마 일제아래서 문물을 익혔던 사람들이 거의 제거되었다. 시대적 분위기나 역사의 사리로 보아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재확보의 기의를 다시금 놓친 셈이다.
변란은 잇달아 6·25를 거치는 동안 역시 많은 인재들을 잃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거나 행방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정치는 여전히 혼미와 전변을 거듭해 역시 많은 사람들은 역량을 발휘하기보다는 위축된 가운데 인재로서의 빚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회적 동요와 불안이 빚어낸 불행이었다.
인재의 축적이 없는 사회는 뿌리가 약한 수목과 같다. 그런 수목일수록 풍파를 견뎌내는 저력도 약하다. 이것은 한 나라의 경우뿐 아니라 모든 조직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각계각층에서 인재의 축적이 풍성하면 그만큼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에도 적응력과 지구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사회일수록 안정의 기반이 튼튼해 웬만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일본의 원로교육자인「스즈끼」(영목중신)씨는 새삼 영재산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의무교육에 의해 일정연한동안 모든 2세 국민에게 기본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개성을 바탕으로 하는 영재교육이 도외시되는 경향에는 이견을 제시했다.
『인간은 어느 연령이 지나면 개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엄연히 격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차이가 있는 개개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수준과 내용의 교육을 질시하는 전원 의무교육제는 의미가 없다』고 「스즈끼」씨는 말한다.
능력별 졸업제 바람직
「유럽」,특히 서독이나「프랑스」 「스위스」같은 나라는 이미 6년의 초급교육이 끝나면, 서둘러 각자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적절한 분야로 갈라져 나간다. 교육의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해야 된다는 발상이다.
교육학자 이영덕 박사는 우리의 교육연한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학제에 융통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가령 졸업년한제 보다는 능력별·졸업제로 하는「아이디어」가 그것이다. 고교과정에서 꼭 3년을 이수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그전에라도 졸업할 수 있는 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래야「엘리트」도 발굴되고, 또 그의 능력을 계속 북돋워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스즈끼」씨는 일본의 어느 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한 예화로 소개했다.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경주를 시키고 나서 그들의 등수를 매길 것이냐, 말것이냐로 교사들이 토론을 벌였다는 것이다.「평등교육」의 한 극단적인 폐습을 지적한 얘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점수를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엄연히 수학을 잘하는 아이도 있고 음악을 잘하는 아이도 있는데 그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사회는 새시대의 설계와 함께 인재를 널리 양성하고 확보하는 일을 큰 과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이것만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며 내일을 기약하는 확실한 열쇠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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