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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는 첫 걸음 … 지역주의 완전 해소, 여야 하기 달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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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호 04면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전 의원(왼쪽)과 강원택 서울대 교수가 1일 오후 중앙SUNDAY 편집국에서 만나 지역주의 극복 전망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최정동 기자

-호남 지역 새누리당 의원의 탄생을 어떻게 평가하나.
▶김부겸=지역주의 타파의 첫발을 디딘 엄청난 사건이다. 나는 지역주의를 ‘악마의 주술’이라고 부른다. ‘다른 당을 찍으면 배신자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정당일체감’을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에게 강요하는 바람에 망국적인 지역주의가 수십 년간 지속돼 왔다. 일종의 ‘거울효과’(마주 본 두 개의 거울처럼 양측이 적대감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찍을 수 없다’는 구실을 상대방에게서 찾아왔다. 그 벽을 이번에 유권자들이 넘었다. 선거 다음날 이정현 의원과 통화했는데 첫마디부터 울먹거리더라. “형, 나 마침내 해냈어요. 봤죠?”라고. 험지에서 선거운동해 본 사람으로 그 의미를 안다. 19년 동안 그가 고생해온 걸 생각하니 정말 눈물겹더라.
▶강원택=호남 유권자들에게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과거처럼 민주당(새정치연합)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김대중(DJ)·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으로 한이 해소된 측면이 있는 데다 민주당이 호남이란 벽에 기대 안주하는 걸 싫어하기 시작했다. 이정현 의원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이젠 호남에서도 새누리당 간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거다. 다만 이 의원의 당선은 지역주의 타파의 첫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 만일 이 의원이 임기 20개월 동안 박근혜 대통령 얘기나 하고 할 일을 못해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호남 민심은) 다시 지역주의로 회귀할 수 있다.

[7·30 재·보선 리뷰] 지역주의 벽 깨지나

-지역주의가 우리 정치를 지배해 왔다고 하는데 얼마나 공고한 실체인가.
▶김=2년 전 19대 총선 때 대구에 출마한 직후 길 가는 할머니에게 명함을 건네드렸더니 누가 볼까봐 주변을 살피며 눈치를 보더라. ‘2번(민주당) 명함’을 받으면 민주당 지지자로 비칠까 두려워한 거다. 기가 막힌 일이다. 지역주의는 암 덩어리다. 정치의 본질을 왜곡한다. 선거 때가 되면 정책은 준비할 것도 없다. ‘우리가 남이가’ 한마디만 하면 당선된다고 여긴다. 지역주의의 핵심은 호남 차별 아닌가. 미국에서 흑인이나 소수자를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하나 없다. 지역주의의 근원을 물으면 신라·백제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는 아니다. 1963년 대선 때 박정희 후보가 15만 표 차로 당선됐는데 34만 표를 호남에서 이겼다. 그때만 해도 지역주의가 없었던 거다. 그러다가 71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지역주의가 생겼다. 즉 지역주의는 국민 아닌 정치인들의 조작물일 뿐이다.
▶강=호남이라고 다 진보거나 빈곤 계층이 아닌데 지역주의가 그런 실상을 다 덮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3김과 양김이 대결했던 87년과 92년 대선까지는 지역주의가 존재했다. 하지만 3김이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은 영·호남 대립이 아니라 서울과 지방 간의 격차가 문제다. 그런데 우리 정당들은 여전히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권자의 요구는 실용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절묘하게 지역으로 편을 갈라 기득권을 유지하니 다수 국민이 정당을 불신하고 지지 정당이 없다고 하는 거다. 여기에다 지역 지식인들도 지역주의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주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당정치의 핵심인 책임성·대표성이 상실된다. 정치인들은 유권자 요구를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선거 때 지역주의를 얘기하면 당선된다고 확신하게 된다. 앞으로 지역주의가 약화되면 정당들이 좀 더 진지하게 보수·진보의 계층 간격과 정책 차별화에 신경 쓰게 될 거다.

-이정현 의원의 당선은 그의 개인적인 역량 덕이 큰가, 아니면 지역구도 타파를 바라는 유권자의 표심 덕인가.
▶김=이 의원이 유세 도중 새누리당 마크를 철저히 숨기고 ‘예산폭탄’ 같은 당근만 강조한 게 먹혔다는 시각이 있는데 잘못된 거다. 그 같은 캠페인은 주민들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당선의 원인이라 여기는 건 유권자들을 너무 가볍게 본 거다. 유권자들은 정당들이 무슨 문제든지 경상도·전라도로 환원시켜 온 데 대해 넌더리를 치고 있다. 모든 게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고 지방대 졸업장 갖고선 직장 얻기도 힘든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전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이정현이 파고든 거다. ‘지역주의를 깬다’는 명분과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실리를 같이 제시했다. 또 지난 19년간 세 차례나 낙선했으면서도 또다시 도전하는 그를 보며 지역민들 마음에 수용성이 생긴 거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유세한 걸 이벤트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뙤약볕 아래 힘들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사람 마음이 찡하기 마련이다. 출마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지지율 1%를 올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반면 서갑원 후보는 왜 그를 찍어야 하는지, 그를 찍으면 어떻게 당이 바뀌는지 제시하지 못했다.
▶강=이번 선거가 재·보궐 선거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총선이나 대선처럼 전체 권력을 다투는 선거가 아닌 거다. 총선은 당과 후보를 일치시켜 찍을 가능성이 크지만 보궐선거는 후보 개인 차원에서 투표 기준을 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정현 후보는 구호를 잘 만들었다. ‘한번 써 봐라’는 게 그거다. 박근혜 정부 임기가 많이 남은 시점에서 ‘대통령의 남자’가 내려와 열심히 하겠다고 한 게 먹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주술에서 깨어나 삶과 직결된 문제를 중시하기 시작한 거다. 또 호남에서도 60, 70대 유권자들에겐 박정희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2016년에 치러질 20대 총선에서도 지역구도가 깨질까.
▶김=이미 부산에선 조경태 의원이 민주당 당적으로 3선에 올랐고 경남에도 최철국 전 의원 등이 당선됐다. 완강한 건 대구·경북인데 이정현 의원의 당선으로 이곳에도 희망이 커졌다. 이 의원의 당선 직후 대구 시민들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는데 ‘아깝다’는 반응이 적지 않더라. ‘우리가 먼저 지역주의를 허물려 했는데 순천-곡성에 선수를 뺏겼다’는 거다. 이런 생각들이 향후 선거에서 변화의 계기가 될 거라 본다.
다만 총선은 중앙 권력을 놓고 진검승부를 펼치는 판이니 표심이 어떻게 흔들릴지 모른다. 유권자들이 나를 찍지 않을 구실을 줄여야 한다고 본다. 2012년 19대 총선 때만 해도 유권자들이 내게 ‘당을 바꿔라’ ‘사람은 좋지만 전라도당이라 못 찍겠다’고들 했다. 하지만 2년 뒤인 6·4 지방선거에선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이 크게 늘고, 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었더라. 결국 정책과 사람만 제대로 내놓는다면 해볼 만하다고 본다. 2년 뒤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구 12개 선거구 가운데 적어도 6~7곳에 괜찮은 후보를 낸다면 상승효과를 일으켜 적지 않은 숫자가 당선될 수도 있다.
▶강=영남에서도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적지 않았다. 김두관 전 경남지사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바 있고 6·4 지방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부산시장에 도전한 오거돈 후보가 서병수 당선인(새누리당)에게 1.4%포인트 차까지 따라붙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회창·정동영 후보 지지층을 분석해봤더니 수도권에 사는 호남·충청 출신 유권자와 호남·충청에 살고 있는 유권자의 표심이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DJ가 뜨면 전국의 호남 출신들이 몰표를 던지고 JP(김종필 전 총리)가 뜨면 전국의 충청 출신들이 결집하던 80~90년대와는 크게 달라진 거다. 유권자들의 고향이 아니라 현재 거주지, 삶의 현장이 더 중요해졌다. 지역주의가 점점 허구화하고 있는 거다. 정치적 의미의 지역주의는 사실상 소멸했다고 본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그밖에 필요한 일은 뭔가.
▶강=지금까지는 정당이 아니라 후보 개인 수준에서 지역주의에 도전했다. 노무현·김부겸·이정현이 그랬다. 이들은 “당은 지역에 오지 않는 게 좋다”고 했고 당도 이를 받아들여 손을 놨다. 그러니 앞으론 당이 앞장서서 지역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87년 민주화 이래 지역주의 정당 구도를 온존시켜 온 가장 강력한 장치가 당시 채택돼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단순다수·소선거구제다.
따라서 석패율제(지역구에 출마했다 떨어진 후보를 비례대표로 구제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선거제도 개혁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석패율제를 도입하려면 비례대표 숫자가 늘어나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지역구를 줄이긴 어렵다. 결국 300명에 묶여 있는 전체 의원 수를 늘릴 필요가 생기는데 우리 사회에선 수용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국회의원을 국민의 대표가 아닌 기득권 세력으로 여기는 데서 나타나는 반응이다. 하지만 지역주의 정당구도를 타파하기 위해선 국회의원 증원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김=맞다. 석패율제가 도입되면 대구·경북 같은 곳에서도 5~6명씩 좋은 후보를 지역별·맞춤별로 낼 수 있다. 이정현 의원의 당선으로 여의도에 한 마리 제비가 날아온 셈이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는 건 아니지만 제비가 와야 봄이 오지 않나. 이번에 중요한 한 걸음을 뗐다. 앞으로는 여야가 하기에 달렸다.
▶강=동의한다. 새누리당은 이정현 의원의 공약이 잘 실현되도록 뒷받침하고 당 차원에서 호남에 더욱 다가서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모처럼 분 지역주의 타파 바람이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다음 총선엔 호남 지역에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인재를 다수 공천해야 한다. 떨어질 게 뻔하다고 인재 공천에 인색하면 지역주의를 절대 깰 수 없다. 새정치연합도 마찬가지다. 영남 지역에 인재를 다수 공천해 주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경상도 사람을 후보로 쓰면 승리한다’는 식의 안이한 정치공학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민주당이 부산 사람인 노무현과 문재인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음에도 호남당 색깔을 벗지 못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영남 유권자들에게 진정성이 느껴질 접근 방식을 찾아야 한다.
▶김=맞는 말이다. 새누리당은 호남을 더욱 껴안고 새정치연합도 영남에 더욱 다가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DJ 정부 시절 한 차례 ‘동진정책’(영남 포용)을 쓴 것 빼고는 사실상 영남을 포기해 왔다. 이래선 안 된다. 변해야 한다.

진행=강찬호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정리=백일현 기자·차길호 인턴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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