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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즉흥과 불협화음의 조화 … 한국인은 숨결 자체가 음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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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호 15면

1975년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의 한남례씨 집에 만들어진 ‘소포 어머니 노래방’에서 지난달 22일 한씨(왼쪽)의 북 장단에 맞춰 동네 사람들이 흥타령과 육자배기 등을 구성지게 부르고 있다. 김춘식 기자

지난달 17일 오후 4시 반,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정현관 앞뜰.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2001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종묘제례악’ 공연이 열렸다. 폭염 속에서도 300여 명의 관람객이 550년 된 왕실의 엄숙한 제사음악에 빠져들었다. 군데군데 외국 관광객들도 보였다.

한국문화 대탐사 <22> 국악<상>

“종묘가 아닌 경복궁 옆에서 조선 왕실의 독창적인 제례음악을 접하다니 행운입니다. 이 제례악을 창조해낸 분이 세종대왕이라네요. 조상에게 중국음악이 아닌 우리 음악을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에서요. 문화적인 자부심이 생겨요.”

초등학교 다니는 두 자녀와 함께 왔다는 주부 임영숙씨의 말이다. 전광판에는 종묘제례악의 어려운 한자어 가사 풀이가 나왔다. 정성스럽게 제물을 준비하고 연주와 노래, 춤을 올리니 역대 제왕께서는 감흥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세종은 동양 최초로 음높이와 리듬을 동시에 표기한 과학적인 악보 ‘정간보’를 펴냈다. 박연이 어렵게 완성한 악기인 편경(編磬)을 시연하는 자리에서 미세한 음 차이를 알아채고 바로잡도록 한 일화가 『세종실록』 15년 1월1일 기사에 전한다.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답다. 다만 이칙1매(夷則一枚·윗단 왼쪽 첫째 돌)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박연이 즉시 살펴보고 “경석(편경의 재료가 되는 특수한 돌)에 가늠한 먹줄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 때문입니다”라고 아뢰고 물러가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

절대음감을 지닌 이 현명한 군주는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감화시키고 민심의 순화를 꾀한 예술정치가였다. 문화융성 국정기조의 원조였던 것이다.

안숙선 국창

국악 연주 때 마이크 사용은 잘못
지난달 17일 저녁 서울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는 20여 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안숙선 국창의 판소리를 듣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반 공연장과 달리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서 몰입도가 높았다. 한국의 프리마돈나 안숙선과 기념촬영까지 한 참가자들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국악기는 음량이 작아요. 악기 간의 음량 편차도 크죠. 그렇다고 해서 마이크를 사용하면 소리가 크게 들릴지 모르나, 국악기 고유의 음색이 사라져요. 특히 산조나 시나위 같은 경우는 소리가 왜곡되고 맛이 떨어집니다. 연주자들끼리 서로 소리를 들어가면서 크기를 조절하고 불협화음의 묘한 조화를 만들어가는 게 능력이고 매력이죠.”

음악평론가 윤중강씨는 마이크 시스템에 의존하는 국악공연 무대의 음량콤플렉스를 지적했다.

마당이나 판의 음악으로 알려진 한국 전통음악에 무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08년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세웠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 원각사 이전에도 가설무대가 있었다. 산대희(山臺戱)는 큰길가나 빈터에 만든 무대에서 벌였던 탈놀음이다. 하지만 국악은 역시 삶의 현장 속에 묻혀서 들어야 일품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거든 꿈은 꾸어서 무엇을 헐거나 (합창 후렴구)아이고 데고 허어 으음 성화가 났네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146번지 시골집의 전통 ‘노래방’에서 구성진 남도 흥타령이 흘러나온다. 1975년 자택에 ‘소포리 어머니 노래방’ 간판을 단 한남례(81) 할머니와 이 동네에 사는 곽순경·한봉덕·김영님씨가 번갈아가며 노래를 받아 이어나간다. 노래방 음향시설 같은 건 없다. 오직 북 장단 하나에 맞춰 토속 민요가락을 끝없이 풀어낸다. 육자배기와 진도아리랑에 이르면 덩실덩실 춤이 절로 나온다.

“일하니라고 아무리 뻗쳐도(고돼도) 소리를 하고 나면 뻗치도 안하고 춥도 안하고 그렇게 재밌어요. 소리를 하면 마음이 개운하니 성가신 일이 없어요. 저녁내 놀아도 안 한 놈(안 부른 노래) 하제 한 놈은 또 안 하지라.”

한남례 할머니는 몸 소리를 하는 농사꾼 가객(歌客)이다. 젊어서는 고달픈 살림살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40여 년 전부터 김막금·정태심 노인에게 민요를 전수받았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이집 저집 사랑방을 떠돌다 ‘어머니 노래방’ 문을 연 이후엔 정착했다. 150여 가구가 사는 소포리에 전통민속전수관이 생긴 뒤로는 거기서 40명가량이 모여 방 가운데 술 한통과 삶은 고구마를 놓고 북 장구에 맞춰 밤새도록 노래한다.

이 마을을 비롯한 진도 사람들은 한(恨)을 흥(興)으로, 죽음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비결이 있다. 장례식이 축제가 되기도 하는 ‘다시래기’의 원형이 살아있는 고을이다. 엄숙한 유교식 장례법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전통이다.

장례 치르면서도 춤추고 음악 연주
『수서隋書』 동이전 고려(고구려)편에는 ‘처음과 끝에는 슬퍼하며 울지만, 장례를 하면 곧 북을 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며 죽은 이를 보낸다’고 나와 있다. 오늘날 상가에서 밤새 화투판을 벌이며 떠들어주는 유습에 그 흔적이 남았다.

한국인은 노래하는 겨레붙이다. 그래서 누구나 가수다. 신명난 문화의 중심에는 늘 노래와 풍물굿이 있다. 가곡(歌曲)은 신과 대자연, 사람이 공명하는 율려(律呂)의 철학을 담고 있다. 한국인에게 율려는 음악용어를 넘어 천지창조 신화의 주체다. 이 땅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곧 별이고 우주의 어머니였다.(신라 박제상의 『부도지』)

6000년 전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인 울진 반구대 암각화에는 사나이가 악기를 다루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도 이미 가야금 형태의 고유 악기(국립광주박물관)가 있었으며 백제금동향로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의장대 행렬이 등장한다. 신라 토우(土偶) 장식 항아리의 앙증맞은 흙 인형도 연주하고 노래한다.

한국인은 숨결 자체가 음악이라고 한다. 제사와 축제, 노동을 할 때도 음악이 있었다. 향유 층에 따라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나누며 민속악은 다시 판소리·시나위와 산조·잡가·민요·농악(풍물굿)으로 분류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서울 경기와 서도·동도·남도·제주로 나눌 수 있다. 악기편성에 따라서는 향피리 중심의 관현합주, 거문고 중심의 줄풍류, 당피리 중심의 관악합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국악문화유산도 종묘제례악·강릉단오제·강강술래·남사당놀이·처용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가곡·아리랑 등 10개나 된다.

무형문화재 제도 덕에 그런대로 보전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악의 원형이 많이 사라져 갔어요. 1964년부터 무형문화재 제도를 시행해 그런대로 잘 보전해온 게 사실이지만 정부기관이나 특정 예술인에 의해서 전승되는 것이 국악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진도에 오면 삶 속에 녹아든 우리 음악을 들을 수 있어요. 특히 대본도 없는 악극(樂劇)을 만들어 즉흥적으로 삶의 애환을 노래로 풀어내는 드라마는 배꼽을 잡게 하고 눈물도 나게 합니다. 이게 국악의 본질이죠.”

김경희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은 진도를 노래의 고향으로 꼽는다. 소포전통민속전수관 김병철 관장은 악극 <김개판의 죽음><대현네 어머니의 사랑><장가가는 날><김개똥이(세월호 17세 소년)의 죽음>을 연출했다. 그는 “진솔한 민요가락이 원음으로 흘러나오는 소포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마을”이라며 서울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 공연한 이력을 자랑했다. 시골마당을 서울 무대로 옮겨온 것이다.

국악은 비교적 원형이 잘 전수돼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음악에 안방을 내준 건 다른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다. 국립국악원의 최근자료에 따르면 현재 일반인 국악 동아리는 전국적으로 63개이며 총 2만1490명이 활동하고 있다. 그중 사물놀이 한뫼(9000명, 서울·부산·경주), 여민락(7300명, 충북 중심 전국-대금), 국악이 꽃피는 나무(2000명, 서울-국악 전반)가 대표적이며 나머지는 화음동인(8명, 부산-해금)처럼 10여 명 안팎의 소규모 동아리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서양음악 동아리는 색소폰(전국 약 25만 명)·기타·드럼(난타)·아코디언·오카리나·합창 등에 걸쳐 100만 명이 넘을 거라는 추산이다(정확한 통계는 없음). 이런 현격한 차이는 국악의 최초경험 시기와 환경이 서양음악에 많이 뒤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013년 (주)인포마스터 연구용역 보고서엔 국악의 최초 경험시기가 20대에서 가장 높았다. 한식이 ‘입맛’이라면 국악은 ‘귀맛’인 셈인데 10대 미만이나 10대에 국악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근대화 이후 서양음악은 상류층 음악, 국악은 하류층 음악(기생음악)이라는 그릇된 인식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태교음악으로 시작해서 장례식 장송곡에 이르기까지 국악과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면 ‘국민의 귀맛’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지하철 안내방송처럼 공공장소에서의 적절한 국악 송출, 이동통신사와 스마트폰 컬러링 맞춤제공 제휴, 인터넷이나 TV 드라마 노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콘텐트 확산도 한 방법이다.

요즘 창작국악, 퓨전국악이 신세대의 각광을 받고 있다. 자칫 국악의 서양화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크다. 그러나 뿌리가 튼튼하다면 국악도 얼마든지 사회적 추세에 맞춰 진화할 수가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 민요의 고장 진도는 온 국민이 진통을 겪고 있는 세월호 사건 현장이죠. 죽음을 개별화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큰 슬픔을 문화적으로 수용해온 진도민요와 다시래기 장례풍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진도사람들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주최자가 돼 국민적 씻김굿을 해보면 어떨까요. 창작판소리나 창작민요가 곁들여지면 더 좋겠지요.”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제안이다. 구전심수(口傳心授), 말로 전하지만 마음으로 받아 깨치는 전통 교수법(敎授法)은 국악에서 빛을 발한다. 판소리의 더늠(독특한 창법)처럼, 산조나 시나위처럼 고정된 형식을 넘어서는 자유와 창조의 국악마당에 창작국악의 길은 활짝 열려있다.



김종록 객원기자·문화국가연구소장 kimkisan7@naver.com
동행취재=김경희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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