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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가야 피 섞인 문노, 진지왕 폐위 공 세워 진골 ‘득골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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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호 28면

신라의 대표적인 용장(勇將)인 문노는 가야국 외손 출신으로 골품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문노는 화랑으로서 삼한 통합을 이룬 신라 용사들의 사기를 일으키고,진지왕을 폐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진골이 됐다. 사진은 문노의 외가 조상들이 묻힌 경북 고령 지산동의 가야 고분군. [사진 권태균]

색공(色供·신분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의 화신인 미실(美室)은 신라 여성 중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미실에 못지 않은 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대표적인 신라 남성으로는 문노(文弩·538~606)를 들 수 있다. 8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문노는 ‘사기(士氣·용사의 기풍)의 종주(宗主·맹주)’로 추앙받았다. 김유신은 삼한을 통합한 뒤 문노를 용맹한 전사의 모범으로 삼고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에 추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신라에서는 또 그를 기려 신궁(神宮·죽은 김씨 왕들의 궁)의 선단(仙壇·화랑들을 모신 제단)에서 큰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17> 골품제 벽 넘은 선구자

『화랑세기』 8세 문노 조에 따르면 문노는 579년 미실의 총애를 받아 풍월주가 됐다. 그는 용맹했고 문장에도 능했다.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서 명성을 크게 떨쳤고, 낭도들은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삼한통일 대업이 그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하지만 문노는 골품사회 신라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에는 부족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야의 외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文華)공주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야국왕(野國王)의 사위가 되었던 가야의 찬실과 신라의 양화공주 사이에 낳은 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야국왕의 공녀(貢女·조공으로 바친 여자)라는 설이다. 야국은 왜(倭)국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문화공주는 왜국에서 가야에 조공 바쳤던 공주이고, 그 공주가 신라인 호조공의 첩이 되었던 것을 뜻한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와 가야의 관계를 살펴보자. 신라 법흥왕(재위기간 514~540)은 가야를 남북으로 나누고 이뇌를 북국왕(北國王·고령의 대가야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청명을 남국왕(南國王)으로 봉했다. 북국왕의 숙부인 찬실이 이뇌왕을 내쫓고 왕이 되자 신라에서는 호조공을 사신으로 보내 책망토록 했다. 그 때 호조공은 북국의 문화공주를 첩으로 들였다. 호조공의 아들 비조부는 아버지의 첩인 문화공주와 잠통(潛通)하여 문노를 낳았다. 문화공주는 신라의 골품이 없었기에 문노는 골품 없이 태어난 셈이다.

전공 세웠지만 신분 달라 출세길 막혀
문노가 이런 출생 배경에도 불구, 신라에서 추앙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화랑도 활동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문노는 가야파의 한 무리를 모아 화랑이 되었다. 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은 문노를 자신의 후계자인 사다함(斯多含·5세 풍월주)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게 했다. 사다함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옥진궁주의 조카다.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랑은 “천자에게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仙徒)의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있는 사람을 한가지로 규제할 수 없습니다. 문노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일정한 소속이 없는 부대)입니다” 라고 답했다.

세종(世宗)은 6세 풍월주가 되었을 때 친히 문노의 집을 찾아가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하건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문노는 세종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를 섬겼다고 한다.

문노는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554년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을 따라 백제를 쳤고, 555년에는 북한(北漢)으로 나아가 고구려를 패퇴시켰으며 557년에는 북가야를 물리쳤다.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문노는 어머니인 문화공주의 출생의 한계 때문에 출세하지 못했다. 그는 아랫사람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대저 상벌이란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라며 달랬다.

6세 풍월주 세종이 진흥왕에게 청하여 급찬(級湌)의 자리를 내리도록 했으나 문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 진흥왕의 왕후 사도가 문노의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자기편으로 삼았다. 세종의 부인인 미실 궁주도 그를 불러서 봉사로 삼으려 했으나 문노는 승낙하지 않았다.

미실이 탐낸 인재 … 처음엔 발탁 제안 거절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자 이번엔 왕후 지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湌)의 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문노에게 급찬이나 일길찬은 부족했던 것이다. 급찬이나 일길찬의 관등으로는 골품을 얻어 진골이 될 수 없었다.

문노의 일파는 7세 풍월주 설원랑에 불복하고 자립하여 일문을 세워 낭도들이 나뉘게 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正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했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여 서로 상하를 다투었다. 진지왕이 즉위했을 때 지도왕후의 아버지 기오공은 문노와 종형제 간이었기에 지도왕후는 문노를 따랐다. 576년 10월 지도왕후는 진지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풍월주와 다른 계통)으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고 협기가 많았기에 호국선(護國仙)이라 했고, 설원랑의 도는 향가를 잘하고 청유를 즐겨 운상인(雲上人)이라 했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민간 또는 재야)의 사람들은 문도(文徒)를 많이 따랐다.

문노는 부인을 잘 맞아 들였다. 그는 국선이 되었을 때 윤궁(允宮)을 받들어 선모(仙母·국선의 부인)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로 진골이었다. 그리고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의 권세는 법흥왕이 거느렸던 소위 칠총신과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문노는 그 어머니 문화공주로 인하여 진골이 될 수 없었다. 윤궁이 문노에게 몸을 허락할 때 “내가 군(君·문노)을 그리워한 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라고 말했다. 문노는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라고 했다.

포석(砲石)명 기와.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가 삼국시대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된다. 포석사에는 ‘사기(士氣)의 표상’인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휘하의 미천한 낭도들도 속속 출세
문노는 윤궁의 도움으로 골품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평소 설화랑, 그리고 설화랑과 사통하던 미실과는 잘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권문(權門·미실)에 거스른다면 뱃속의 아이는 어떤 처지에 있게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문노는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면 의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선모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이에 윤궁이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 사심)에서 나오니 세 가지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정(大情)은 의(義)가 되고 대사(大私)는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라며 설득을 했고, 문노가 깨달아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화랑을 받아들여 주었다.

문노가 골품의 장벽을 넘어 진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579년 진지왕의 폐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실을 왕비로 삼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공(진평왕)을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거사세력은 진지왕을 폐위시키는데 문노의 낭도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세종과 문노의 낭도를 하나로 합치고 미실을 원화(源花·화랑 전체의 여자 우두머리로 풍월주를 대신함)로 삼고, 미실의 남편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으로 삼아 목표를 달성했다. 이로써 문노의 낭도는 미천한 사람으로서 높은 관직에 발탁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노의 낭도는 출세하는 문으로 여겼기에 문노를 신(神)과 같이 받들었다.

문노는 진지왕을 폐위하는데 가담한 공으로 8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윤궁의 내조가 컸다고 하겠다. 이 때 문노는 아찬(阿湌·6등급)의 관등을 갖게 되어 비로소 골품을 얻을 수 있었다. 윤궁은 기뻐하며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했다. 문노의 득골품(得骨品)은 그가 윤궁과 동골(同骨), 즉 같은 골인 진골(眞骨)이 된 것을 뜻한다. 문노가 진골이 되기 전에는 윤궁의 신분이 높아 문노가 윤궁의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문노가 득골품을 한 결과 미실이 진평왕에게 청했고, 진평왕이 명령을 내려 윤궁을 문노의 정처로 삼게 했다. 진평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가 길례(吉禮)를 행했다.

모범 부부의 상징이 된 문노와 윤궁
이때 윤궁은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라고 했다. 윤궁은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들에게 주었고 문노가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했다. 문노는 풍월주로서 유화(遊花·화랑도에 머물던 여자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문노는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모두 윤궁이 문노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로서는 문노와 같은 이를, 처로서는 윤궁낭주와 같은 이를 택해야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2년 정월 조에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화랑세기』를 보면 금강은 문노의 아들인데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문노의 종족(宗族)이 당당하게 진골이 된 것이다. 높디높은 신분적인 장벽을 뛰어 넘은 문노를 통해 신라 골품제가 그렇게 막혀만 있던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본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이종욱 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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