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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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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했다는 소문은 우리가 평양에 있을 때에도 간간 들려 왔었다. 그러나 10월25일 운산에서 처음으로 접전이 있은 후 별로 두드러진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UN군측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지점 개설의 통괄책임을 맡은 박숙희는 11월11일께 평양에서 돌아오자 이상윤 원산지점장, 김명수해주지점장을 독려하여 북한지점개설 준비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평양지점에는 박완선ㆍ김두춘, 원산지점에는 주철동, 해주지점에는 하재룡등 직원도 배치하고 개설에 필요한 물자조달과 그 수송대책에 만전을 기했다. 북한지점 개설요원을 군속으로하여 박숙희는 대령, 이상윤ㆍ김명수는 중령대우를 하도록 국방부장관에게 요청했다.
한편 행내에서는 한국은행권과 북한화폐의 교환율을 놓고 활발한 논전이 전개되었다.
북한의 화폐발행액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도 없는 판국에 6대1로 교환했다가는 한은권이 무진강 나가야할지도 모르니 위험하다는 논과 북한주민도 다 같은 거례인데 1대1로 교환해서 희생시킬 수 없다는 설이 대립하여 격론을 벌였던 것이다. 또 8ㆍ15해방후 조선은행 조사부에서 조사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북한의 화폐발행액을 추정하는 작업도 진지하개 진행되었다. 그러나 11윌하순 중공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12월4일에는 미8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UN군이 후퇴함으로써 한국은행의 북한지점 개설준비계획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9ㆍ18수복후 유리한 전세, 금융기관점포의 재개, 통화교환조치를 통한 무폐정화등의 과정을 밟아 금융질서는 점차회복되고 금융기관 예금은 대채로 안정선을 유지했다. 그래서 금융점상화를 위하여 예금에 대한 지급제한조치를 일부완화하기로 하고 12월1일 우선 상점예금에 한해서는 그 지급제한을 해제했으며 또 환거래도 부활했다. 그리고 이 지급제한 해제를 계기로 연말자금과 예금인출로 인한 통화팽창을 억제하기 위하여 12월l일부터 1951년1윌31일까지 2개월간에 걸쳐 3백억원 목표 필승 저축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미처 궤도에 오르기도전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민심은 다시 동요되고 전세가 급변함에 따라 부산지방을 제외한 각지 예금은 대폭 감소되어 저축증강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통화는 6ㆍ25동란이 발생한 달인 6월말 연재 6백69억원에서 9ㆍ28수복후인 9월말 현재에는 9백49억원으로 증가했고 다시 12월말에는 2천2백92억원으로 9월말에 비해 1천3백43억원이나 급증했다. 이 팽창액은 같은 3개월간이지만 동란후 9월말까지의 증가액 3백91억원을 3배이상이나 능가하는 폭발적 급증세였다. 환도후 실시된 제2차 및 제3차 통화교환조치에 의하여 예금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통화가 급증한 것은 군작전과 전재복구를 위한 방대한 재정자금 지출에 그 주된 원인이 있었다. 9월말 이후 12월말까지 3개월간에 재정자금 1천77억원,「유엔」 군대여금 4백86억원, 합계 1천5백63억원이 지급초과된 반면 민간자금에 있어서는 36억원의 추가신용이 있었으나 예금증가가 1백13억원에 달하여 예금ㆍ대출을 차감하면 오히려 77억원의 은행권을 감축시키는 작용을 했다. 또 전세불리로 말미암은 재차의 후퇴를 앞두고 「유엔」군 후퇴지역으로부터 부산등 피난지에 대한 송금이 적지 않았으니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으나 하여간 12월말 통화량에는 1백46억원이라는 통화환수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하면 재경자금 및 「유엔」군 대여금으로 말미암은 통화팽창 요인 1천5백63억원에서 예금증가액 77억원과 1ㆍ4 후퇴를 위한 일시적인 송금액 1백46억원을 차감한 1천3백40억원이 통화팽창액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중공군의 대거남침은 전쟁규모의 확대, 장기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예견케했고 그 결과 재정자금적자 및 「유엔」군 대여금의 가일층 급격한 증가는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한국은행 창립당초의 임원진은 수석부총재 허민수, 부총재김진형 임송본, 은행감독부장 안명환, 감사 나승호로 출발했다. 그런데 허민수는 8월31일 한국신탁은행(현 한일은행) 두취(은행장)로 전임했고 김부총재는 동경에 주재했으므로 실질적으로 나를 보좌해줄 부총재는 임부총재 뿐이었다. 오르지 군자금공급과 이를위한 은행권조달에 전념했던 전쟁초기에 있어서는 돌발적인 전쟁발생에 응급대처하자면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하여 내손발 같이 움직여주는 부국장들을 내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편이 전시체제로서 능률적이고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대처해서 한국은행도 진영을 새로 가다듬지 않을수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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