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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인들이 말하는 비극의 현장|밀고밀린 3년…산하도 모습을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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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세대를 마감하면서 6·25그날을 다시 맞는다. 낙동강을 배수진으로 압록강까지, 밀고 밀린 3년여. 수도서울을 두번이나 빼앗기고 뺏으면서 강마다 봉우리마다 삼천리강토는 피로 물들었고 겨레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6월이면 해마다 짙푸른 산하는 말이 없지만, 악몽같았던 민족의 비극을 그때의 주인공들은 어제 일처럼 되새긴다.

<서울적화>
서울은 전쟁발발 3일만에 유린됐다. 이렇다할 저항없이 수도를 점령한 김일성은 이승엽(북괴 사법상)을 그날로 「서울시인민위원장」에 임명하고 공산화를 서둘렀다. 「9·28수복」까지 3개월동안 서울은 검거·납치·학살선풍으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이같은 수난은 서울에서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치하 3개월동안 전국에서 16만5천명이 학살당하고 12만2천명이 납치돼갔다. 서울에서만 9천5백명이 죽고 4천2백명이 끌려갔다.
서울에서는 당시 1백40여만명 가운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1백여만 시민이 앉아서 난을 당했다.
부괴가 「탱크」를 앞세우고 들이닥치자, 지하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열광했고, 대부분은 정관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지하로 잠복해야했던 사람들은 인간의 인내한계를 시험당했다.
6월27일밤까지 방송으로 국군감투를 호소하다 적치3개월을 체험한 모윤숙여사(69)는 적치 서울을 되돌아본다. 『28일 새벽 변장을 하고 피난길에 나서는데 서울시내에는 「오토바이」를 탄 북괴군대열이 깃발을 흔들며 호기있게 누비고 길가에는 일부 시민들이 어느새 만들었는지 손에 적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어요.』
모여사는 『바로 그곳에서 멀지않은 서울역에서는 북괴군이 국군포로 2백여명을 세워놓고 무서운 학살극을 벌이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변절자들의 밀고로 쫓기고 쫓긴 모여사는 광주 남한산속에 숨어있다 9·28을 맞았다.
북괴는 3개월동안 자유시민을 꼼짝 못하도록 각종 조직으로 묶었다. 당시 북괴의 충남도당선전부책으로 파견됐다가 귀순한 김남식씨(56·군사평론가)는『북괴는 남한점령지역에서 전력을 짜내고 반대세력을 봉쇄하기위해 당과 행정기구를 재빨리 조직했습니다. 북괴는 정규군의 뒤를 바짝 따라가면서 북에서 신망을 얻고있는 자를 뽑아 조직 책임자를 남파했어요』라고 증언했다.
당·인민위원회·민주청년동맹·여성동맹·직업동맹등으로 묶어 한사람이 보통 2∼3개 조직속에 들어가게 하고 하루에 몇번이고 회의를 열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했다.

<다부동전투>
그해 8월 낙동강교두보에서 발이 묶인 북괴는 독전대까지 만들어 대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8월공세」였다.
백선엽장군의 한국군 1사단은 당시 다부동에서 적 4개사단을 맞았다. 경북칠곡군가산면다부동. 8월5일 낙동강상류를 건넌 북괴군은 『8·15를 대구에서 맞겠다』며 그 길목인 이곳을 발악적으로 공격해왔으나 1사단은 월여의 혈전 끝에 끝내 사수, 적4개사단을 전멸시키고 승기를 잡았다. 왜관에서 다부동에 이르는 이 전투에서 당시 l사단은 하루 평균 7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8월말까지 적과 싸웠다.
김점곤교수(57·당시1사단12연대장·예비역소장·경희대)는 『나중에는 소대장과 분대장이 모자라 연대본부 요원을 모두 전선으로 내보내고 1백50여명의 여고생으로 후방요원을 충당했어요』라고 격전당시를 회고한다. 『하루는 대낮에 적1개연대가 1·5m깊이의 낙동강지류를 건너왔어요. 기관총을 쏘아대는데 미공군기가 날아와 휘발유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던졌어요. 강물위가 불바다가 되면서 우왕좌왕하던 북괴병들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생지옥을 이루었어요.』격전을 되돌아보는 김교수의 말이다.
그때 마을주민 1백여명으로 민간특공대를 조직해 국군의 탄약과 식량수송을 맡았었다는 이마을 전경화씨(64)는 이렇게 증언한다. 『수목이 울창하던 앞 뒷산은 온통 벌거숭이가 됐고 쏟아지는 포탄으로 밤이 낮처럼 환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시체가 산야를 메우고 한여름 햇볕아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어가고 있었지요.』
뒤에 「유엔」군 사령관을 역임한 「존·H·미켈리스」 대령의 미27연대와 합동작전으로 미군으로부터 포병·항공지원을 받으면서 한국군1사단이 이 전선을 지켰기 때문에 「유엔」군은 9월들어 낙동강 교두보로부터 반격에 나설수 있었다.

<영천회전>
북괴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던 9월공세때에 낙동강교두보는 여러곳에서 아슬아슬한 고비  겪었지만 9월5일 영천이 뚫렸을 때 한국군은 전전선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14일까지 9일동안 영천에서는 낙동강교두보의 운명을 건 쌍방이 혈전을 거듭해 한국군은 4번이나 뺏기고 뺏으면서 교두보를 끝내 사수했다.
이 전투를 맡았던 당시 2군단장 유재전장군(59·유공사장)은 말한다. 『영천회전이야말로 국군이 극적으로 역전승, 적15사단과 8사단을 섬멸하고 국가의 위기를 건진 구국의 한판싸움이었어요. 적은 여기서 대구나 경주로 향할 수 있게되어 낙동강교두보의 일대 위기였어요. 하양에 있던 군단본부의 전방지휘소를 영천쪽으로 옮기고 직접 영천읍에 들어가 독전을 했지요.』 유장군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영천회전의 승리에는 제8사단21연대의 공이 컸어요. 어떻든 일기가 나빠 미공군의 지원도 받지 못한채 국군단독으로 치러낸 이 전투로 적은 기진했고 인천상륙에 맞춰「유엔」군은 총반격에 나섰어요』라고 회고했다.
김용배강군(당시 대령·전육군참모총장)의 21연대는 미처 후퇴명령을 받지못해 영천북방 20km지점인 적후방에 고립돼으나 편제를 그대로 유지, 유격전을 벌이면서 적의 후방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승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백마고지전투>
전세는 3개월이 지나면서 한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속전즉결을 노렸던 북괴는 전선이점점 불리해지자 전쟁발발 1년만인 51년6월24일 소련부외상「야콥·A·말리크」를 통해 휴전을 제의했다. 그러는 한 편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뺏겠다는 욕심으로 북괴는 곳곳에서 필사의 전투를 걸어왔다.
52년10월6일부터 열흘동안 이곳 백마고지(3백95m)는 24번이나 주인을 바꾸면서 30여만발의 포탄세례를 받아야했다. 중공군 2개사단을 완전히 괴멸시키고 끝내 이 고지를 사수한 한국군 9사단은 그 뒤 백마사단이라는 자랑스런 별명을 얻었다. 백마고지는 철원평야를 내려다보며 철원∼금화를 제압할수 있는 요충지로, 당시 이곳을 뺏기면 주저항선을 60km나 후퇴해야하는 곳이었다.
9사단30연대 정보과소속 일등중사로 이전투에 참가했던 황보향씨(52·강원도철원읍화지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밤이면 나팔과 꽹과리를 치면서 달려들던 중공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치의 땅을 더 뺏기위해 무수한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간 자국은 이곳 백마고지만이 아니다. 저격능선·피의능선·수도고지….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냈던 산야들이 지금은 울창한 수풀로 단장됐지만, 1백55「마일」휴전선을 따라 펼쳐진 봉우리마다에는 민족분단의 아픔이 서려있다.

<권정용·이순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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