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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조사 과정서 의심·비웃음 … 또 성폭행 당한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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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독일 정부는 성폭력 근절을 위해 범죄를 신고한 피해자를 적극 보호하고 있다. 사진은 성적 괴롭힘을 당했을 때 즉시 상담하라고 권유하는 정책 홍보 포스터다.

성폭행 피해자인 김모(31)씨는 자신을 유린했던 군인의 재판에 갔다가 당한 수모를 잊을 수가 없다.

 “혼자서 군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군 부대에 들어갔을 때예요. 절 보고 수근거리고 키득키득 웃는 군인들 모습…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아요”.

 김씨는 옥탑방에 혼자 살고 있다. 노크 소리에 택배인 줄 알고 문을 열었다가 생면부지의 젊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뭔가 검은 게 확 들어오는데 앞이 캄캄했어요. 눈을 청테이프로 가리고 목으로는 흉기가 들어오는 거예요. 옥탑방에 도둑이 들리는 없을 거고. ‘아 이거 강간이구나. 성폭행이구나’ 했어요.”

 바로 신고했고 범인은 잡혔다. 휴가를 나온 군인이었다.

 군사 재판을 위해 강원도 원통까지 가야 했다. 그 곳에서 김씨는 상상도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렸다. 김씨의 신변 보호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 내용이 부대에 퍼져 마치 사병들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김씨는 마치 발가벗겨지는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했네, 안 했네. 계속 한 시간 동안 물어보고 얘기를 하는데… 군인 중에 웃는 사람도 있었어요.”

 김씨는 더 이상 재판을 받을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1000만원에 서둘러 합의를 하고 밤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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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를 내 신고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 큰 상처를 받고 후회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수사 당국은 신고를 독려하고 있지만 막상 수사가 진행되면 경찰과 검찰에서 피해 진술을 하고 재판 과정을 겪는 동안 신변 보호가 너무 소홀하다는 호소가 잇따른다. 특히 개인정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경우 피해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집주소와 이름까지 공개돼 버렸다”며 “나를 짓밟았던 놈이 제대한 뒤 찾아와 해코지를 할까 봐 성형수술까지 했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주장은 여기저기서 잇따른다. 의붓아버지에게 몇 년간 성추행을 당해온 이모(16)양도 수사 기관에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지난 건데, 날짜랑 시간이랑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다그치니까….” 이양이 기억하는 계부의 성추행은 수 십번이었지만 결국 6건 만 인정됐고 의붓아버지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이양의 경우 13세 미만일 때부터 피해를 입었지만 처벌 과정에서 이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고 이양의 변호인은 주장한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 중 13세 미만 아동은 1123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4%였다. 하지만 실제 피해 숫자는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아동의 경우 성폭력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적극적으로 신고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아동 성폭력의 경우 전문인력을 동원한 보다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김재련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은 “아이들은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바라본다는 걸 느끼면 어른보다 훨씬 긴장하게 된다”며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아빠한테 강간당하는 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라서 나라면 전부 기억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판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때로는 피해자가 ‘무고죄’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한다. 사업 관계로 알던 지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김모(50)씨가 그런 경우다. 성추행 신고를 했지만 상대방은 무혐의 처분을 받고 거꾸로 자신이 피의자가 된 것이다. 1년 반의 소송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김씨에게 남은 것은 상처 뿐이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수없이 모멸감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김씨는 “조사 과정에서 자세한 행동 묘사나 평소 성 취향까지 너무 자세하게, 그것도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물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신은 성폭력 신고를 주저하게 하는 원인도 된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국내 성폭력 피해 경험자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응답한 경우는 1.2%에 불과했다. ‘신고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등을 주요 이유로 꼽았다. 정혜선 변호사는 “성폭력은 끔찍한 충격이기 때문에 사고 후 일부 기억을 잃는 증세가 종종 나타난다”며 “구체적인 행위나 시간·장소 등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진실성을 의심하는 조사방식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임진택 기자

◆제작지원 : 미래창조과학부·방송통신전파진흥원
◆취재협조 : 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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