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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생활 35년… 네딸을 키웠다|「노동자의 수기」써서 우수상을 받은 이재윤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통번5237번』-. 첫마디 자기소개를 이렇게 무심결에 해버리는 아주머니 여공 이재윤씨(49·광주시서구임동604). 내일 모레 쉰살을 꼽는 그는 꼭35년째 방직기계 앞에 서온, 그의 말대로「평생 여공」이다.
7일상오 서울여의도전경련 강당에서 열린 노동청의 근로자수기 시상식에서 이재윤아주머니는 자신의 과거를 쓴 것으로 우수작상을 받았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것은 그가 일제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여공」으로 노동해왔다는 사실과 딸넷을 낳아 기른 어머니의 몸이면서 오늘도 평공원으로 3교대 일을 한다는 드문「케이스」다. 노동청의 특별초청으로 그는 3일 휴가를 얻어 생전처음 서울에 왔다. 마침「어버이날」, 큰선물을 받은 것같다고 흐뭇해한다.
『나만큼 오래 버틴 사람은 없겠지요?』 14세「어린이」로 광주의 「종방」회사 여공으로 들어간 이래 35년간 단하루 결근도 없이 같은 장소, 같은 건물속에서 그는 실빼기 작업만 해왔다.
현재 광주 일신방직 방적과 정방계 공원. 그동안 회사이름이 「종방」에서 「전남방직」 「일신방직」으로 바뀌었고 사장과 기계와 동료들이 몇바퀴씩 바뀌는 속에서 그만이 그대로「여공」이다.
『그동안 사연을 어떻게 말로 하겠어요?』노동하는 여성답게 젊고 싱싱한 눈길에 웃음을 자주 한다. 『하기야 할 얘기가 정말 많지요. 일제땐 매도 많이 맞으면서 일했어요.』 식민지 종살이의 설움, 노동자의 설움, 여자의 설움을 세겹으로 몸에 안고 지내온 35년이라고 무겁게 손가락을 꼽는다. 그것이 한국의 여자노동자라고 이씨는 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8·15해방과 6·25를 겪으며 기계를 지겨온 덕에 지금까지 회사에서 대접받고 일해온 셈입니다.』 회사의 내력을 집안 족보 읽듯이 즐겁게 꼽는 이씨를 가리켜 주변에선 「창업공신」이라고 말해주지만 그는 지금까지 어떤 특별한 사례도 받아본적이 없고 『일을 계속할수 있는 것만 고맙다』고 했다.
일신방직에선 그에게 특별히 정년을 55세로 확약해줬다.
『지금 월급요? 그건 뭘 말해요?』
『수당까지 다 합치면 8만원은 됩니다.』
『다른애들 보다는 그래도 1, 2만원 많은 겁니다.』
그자신 당황한듯 재빨리 손을 저으며 다른 얘기를 하자고 말머리를 돌린다.
『나를 보고 기계박사라고 해요. 요즘 짜는 면사20수는 내가 짠것이 가장 매듭이 적어 일신방직에선 1등이라고 합니다.』
젊은 동료 여공들로부터 「엄마」라고 불리지만 「일하는데는 펄펄 난다」며 자랑한다. 방직공은 기계때문에 키가 1백53㎝이상이어야 하지만 그는 1백46㎝.
기계4대를 앞뒤로 놓고 한창 일 할때면 온몸이 땀, 신발까지 흥건하게 젖는데 누구보다 재빨리 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고리 소매를 걷어 여기저기 거뭇거뭇한 상처를 보여주며 그는 『기계를 좋아하면 이렇게 안다칠수가 없다』고 변명하듯 얘기한다.
『기계는 내 남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계에 정신을 쓰니까 남편생각이 없어지더군요.』 14세때부터의 이 여공은 21세에 시집가서 딸 4명을 낳고 30세에 과부가됐다. 친정이고 시댁이고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여공 생활을 줄곧 하지 않을수 없었고 마침내 지나고 보니 기계와 일을 사랑하는 노동자로 된 것이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요. 지금은 나쁜 일 생기면 회의실에 모여서 막 토론하는것이 좋아요. 걸핏하면 모가지 땐다고 으르렁거리던 나쁜 남자들도 없어져서 편하구요.』 이씨는 작년말 순전히 여공들의 투쟁으로 10여년 노조지부장(남자)을 사퇴시키고 여자지부장을 뽑아놓은 사실이 무엇보다 봉쾌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여공들 힘이 많이 커졌읍니다. 모두 똑똑하고 노조일도 잘해요.』 35년 여공의 한을 그는 지금의 「아이들」속에서 마음껏 푼다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가 「하숙집」이라고 부르는 그의 가정도 4명의 딸들이 모두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2명은 결혼, 두딸도 취직해서 어머니를 돕는다.
『딸들이 벌어서 냉장고도 사고 전화도 놓았읍니다.』<윤호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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