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국 왕릉의 유물만으로 기자조선실재 단정은 성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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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역사기록이 없는 상고사는 수수께끼 투성이다. 최근 중공 하북성 평산현에서 출토된 중국고대 중산왕릉의 출자형 청동기는 우리민족의 뿌리인 동이족 문화권 고유의 유물이며 중산국 일대가「제2의 기자조선」이라는 이형구씨(정신문화연구원)의 발표(본지4윌l일자·7면)는 우리 학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같은 왕릉에서 나온 또 하나의 청동기유물(금은상감호형청동기·사진)이「시베리아」를 거쳐 들어온 북방「스키타이」민족의 전형적 유물이라는 일본학계의 발표(일본경제신문 3월25일자)는 이씨의 의견과 크게 엇갈리는 것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유물을 소개한 경도대「히구찌·다까야스」(통구융강)교수는 사슴을 입에 물고있는 호랑이의 모습은「스키타이」의 동물의장이라면서『중국전국시대의 문화에 끼친「스키타이」의 영향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 유물과 관련, 이씨가 주장하는 대로 선우중산국의 조상인 기자가 과연 한민족인지, 기자의 이동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하고있다. 『기자의 역사는 중국사에서 다룰 문제일 뿐』이라는 김정배 교수(고려대)의 반론을 소개한다.<편집자주>
한국고대사에서 기자조선문제는 아직도 논의가 더 필요한 분야다. 실제로 이 시대를 연구하고자 할 때는 누구나 관계 사료와 금석문의 일차적인 검토를 해야되고 이에 못지 않게 이 시대를 전후한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이형구씨가 기자조선에 관한 실존설을 믿고 이에 대한 중공 측의 고고학자료와 금석문을 인용하여 의견을 개진한 것은 논쟁이 필요한 고대사 학계를 위하여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역사연구도 마찬가지지만 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할 때는 연구자의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와 입장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어야 한다. 더욱이 기자조선은 중국의 역사학계도 관심을 갖고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피차의 주장에는 누구나 수긍이 가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학문적으로 승복을 하게 된다.
필자는 기자와 기자조선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성격임을 누차 강조한바 있다. 기자가 은 말의 현인임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만약에 기자가 우리 나라로 동래하지 않았다면 기자는 한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사의 처지에서 다루어질 문제다.
그러나 기자가 동래 하여 기자 조선이 되었다는 사료들은 문헌비판에서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대체로 학계에서는 이를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고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유물에서도 은대의 유물들이 이 땅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어 기자조선의 성립근거는 아주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하면 이 기간은 거의1천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되므로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이에 상응하는 고고학적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은나라와 관련되는 유물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의 중국 고고학자 장광직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만주와 그 이동에서 은나라의 유물들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이씨는 기자조선의 실존근거로 하북성 평산현에서 선우중산국의 왕릉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과 북경근처 무청현에서 선(우)우군비가 발견된 바 있다는 점을 주요 증거로 제시하였다. 특히 이씨는 비문에 선우족이 은의 기자후예라고 적혀 있다는 점에 크게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왕릉의 발굴과 비문의 발견은 기자에 관한 사실들을 밝히는 문제들이지 이것들이 기자조선의 실존을 설명하는 충분한 예증은 되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씨가 중요한 증거라고 보여 주는 자료들은 기자나 그 일파에 관한 보충자료일지는 모르나 그것도 중국사에서 취급되어야할 성질의 것이지 한국사와 관계되는 자료로 간주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기자조선이 존재했으리라는 확신에서 기자에 관한 사실들이 일부 노출되자 이를 기자조선의 실증으로 결론지은 것 같다. 이것은 바람직한 연구방법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우국이나 그 위의 중산국은 기자와 관계될지는 모르나 한국사와는 관련이 없는 역사의 대상이다. 우선 역사의 내용에서 뿐 아니라 역사지리의 입장에서도 이 지역의 역사와 우리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씨는 대릉하 연변에 기자조선이 있었고 이번의 중산국은 기자의 별지라고 보는 모양인데 만약 이 점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면 이것은 중국사의 기자문제를 거론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발해만의 문화가 중심이라고 보지만 석관묘의 경우「하버드」의 장 박사는 이미 이 지역에 석관묘가 집중 분포되었음을 언급한바 있다. 또 발해연안에서 청동기문화가「시베리아」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소련 등 인접국가들의 학문성과를 더 넓게 살핀 후에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적석이나 출자형 관 등을 들어 기자조선을 고고학적으로 해명하려 한다면 이것들이 전체 한국의 고고학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유물들의 선후관계가 설명되었어야 마땅하다. 이번 중산국 왕릉에서 나온 유물 중에 호랑이가 사슴을 먹는 조각을 일본의 「히구찌·다까야스」(통구융강) 교수는 「스키타이」문화의 영향으로 보고있는데 이는 올바른 파악인 것이다. 오히려 이씨의 글이 기자조선을 부인하는 입장의 논조라면 혹 일리가 있었을지 모른다.
김정배

<고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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