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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의료 한류' 물꼬 트는 병원 수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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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왕준
한국의료수출협회장
명지병원 이사장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수출 1억 달러를 처음 달성했던 1964년 우리가 가장 많이 팔았던 것은 석탄과 철광석이었다. 여성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도 팔았다. 80년대에는 신발과 의류를 팔아 외화를 벌어들였고, 90년대에는 저가 전자제품과 반도체를 수출했다. 현재는 휴대전화·자동차 같은 고부가가치의 한국 제품들이 세계를 누비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변화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발 빠르게 새로운 주력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전성기가 이어질까?

 우리 기업들과 정부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이른바 차세대 성장 동력이다. 서울대병원이 중동에 ‘병원을 수출했다’는 최근의 뉴스는 그런 점에서 매우 반갑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상품’이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은 아랍에미리트(UAE)의 왕립 칼리파 전문병원을 5년간 위탁 운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병원은 암과 심장질환 등을 주로 다루는 3차 병원이고, 직원은 1400명이 넘는다. 서울대병원은 임상부문뿐 아니라 간호 영역과 의약품 관리, 식당 운영부터 오물 처리에 이르기까지의 병원 관리 전반과 인력 훈련, 병원정보시스템 등 전체 운영을 맡게 됐다. 한마디로 병원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으로, 병원 수출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파견될 국내 인력만 200명이 넘고, 운영비로 벌어들일 돈은 향후 5년간 1조원에 이른다. 그 자체로도 큰돈이지만 국가 브랜드 향상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더 클 것이다. 향후 국내의 다른 병원들과 관련 기업들도 적지 않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국 의료는 국내에서는 많은 불만과 비판의 대상이다. 국민들은 ‘3시간 대기, 3분 진료’ 현실을 불평하고, 의료계는 저부담(낮은 건강보험료), 저수가(원가에 못 미치는 의료수가), 저급여(낮은 건보 혜택) 등 이른바 ‘3저 시스템’의 한계에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3분 진료와 3저 시스템은 한국 의료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것이 오히려 한국 의료의 경쟁력으로 대두되고 있다. 후진국은 물론이고 선진국까지 수십 개 나라 전문가들이 매년 한국의료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한국의 병원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료 수준이 높은 데 비해 비용은 낮다. 최첨단 정보기술(IT)이 활용되고 있으며, 진단부터 치료까지 모든 절차가 놀랍도록 신속하게 진행된다. 한국의 병원들을 방문하는 외국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재 세계 보건의료산업 시장의 규모는 무려 80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그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그나마 국내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블루 오션’이기 때문이다.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등 눈에 보이는 상품의 수출은 오래전부터 선진국이 독점해 왔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병원 수출은 그들도 별로 시도하지 않았거나 성공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이다.

 병원 수출은 설계와 건축, 의료 인력의 파견, 전산 시스템의 구축과 운영, 현지 의료인의 교육 훈련, 건강보험체계, 진단 및 치료 장비, 경영관리 기법 등 수많은 유·무형 상품들의 수출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일류 기술을 가진 국가라는 이미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소득은 별도다.

 이처럼 거대 시장을 확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관련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영리법인인 의료기관들이 정관을 변경하면 해외로 영리 투자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행 의료법을 보면 의료법인의 해외 투자가 가능한지가 애매하다. 가장 좋은 대안은 ‘국제의료법(가칭)’ 같은 법률을 만들어 해외 진출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아니면 의료법을 개정하든지, 해외진출이 가능하게 유권해석을 명확하게 하든지 조속히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해외 진출 자금 마련도 과제다. 서울대병원이야 돈을 투자하는 게 아니어서 문제가 없다. 투자를 동반할 경우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병원 수출 성공사례가 있어야 민간이나 금융회사가 돈을 댈 텐데 아직 전례가 없으니 투자 자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 급한 대로 정부가 병원수출 펀드를 조성해 지원하는 것도 방안이다.

 해외에 공장을 만드는 것보다 병원 수출이 더 힘들다. 한국 의사나 간호사, 경영진의 역량 강화가 절실하다. 해외에 나가려면 언어·교육·경영·노무관리·협상·기술이전 등의 전문적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환자 대응요령과 진료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 의료진이 현지화해야 하는데, 이런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 이런 능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우리 의료 시스템의 장점들을 잘 조합해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 ‘의료 한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왕준 한국의료수출협회장 명지병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