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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사회참여 주창한 비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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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월25일 「프랑스와·미테랑」 사회당수와 점심을 하고 나오다가 「트럭」에 치여 중상을 입고 입원한지 한달만에 사라진 「롤랑·바르트」는 「앙드레·지드」와 「마르셀·프루스트」의 예찬자로서 문학의 사회참여 이론으로 불멸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15년생. 「파리」의 「몽테뉴」와 「루이·르·그랑」고등학교를 거쳐 「소르본」문과라는 「엘리트·코스」를 밟은 그가 문학 비평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것은 53년 『영도의문학』을 발표한 이후였다.
그의 자전에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인용되고 있으나 얼마후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은 독일작가 「베르톨드·브레히트」였다.
그는 「브레히트」를 통해서 「카를·마르크스」를 알게 됐으며 「마르크스」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자는 이상을 『영도의 문학』에 담았다.
『우리에게 훌륭한 사회를 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훌륭한 문학을 줄수 있을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마르크스」주의 비평가 「뤼시앵·골드만」처럼 문학작품을 통한 경제사회현실의 폭로는 주장하지 앉았다.
그는 『쓴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치』라고 봤다.
그에게 정치는 역사·사회현실에서, 그리고 또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현상이었다.
형식은 모든 의미를 창조하는 하나의 운동에 참가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타일」은 단순한 장식일 수 없다는 해석이다.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면 그것은 그 사회자체가 벽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57년의 『신화』는 『영도의문학』 이론을 현대사회의 각분야에 확대, 적용한 고전이다.
60년대에 그는 『「라신」에 관해』(63년) 『비평과 진실』(66년) 『「모드」의 조직』(67년)등을 썼는데 그의 신비평이론은 크게 비판받아 대논쟁을 일으켰었다.
당시 「프로이트」파는 「마르크시즘」의 예술적 이용에 동조했으며 문학해석에 있어 작가 자신과 작품만으로는 완전한 의미를 끌어낼수 없고 대학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사회·경제적해석-만이 옳다고 주장, 격심한 반격을 받았다.
「레이몽·피카르」교수는 『신비평은 현대판 사기꾼』이라고 매도했으며 대학을 배타적인 문학단체정신으로 모욕한다고 비판했다.
그후 그는 사회학적 문학노선에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기호의 적』(70년)에서 『작품속에 숨겨진 의미를 각자가 즐기듯이 각자는 똑같은 자유를 누린다』고 밝혔다.
『「사드」「푸리에」「로욜라」』(71년) 『원전의 즐거움』(73년) 『사랑하는 연설의 편린』(77년)등에서 보듯 그는 70년대에 오히려 사랑과 환상과 기쁨의 문학쪽에 열중했었다.
『환한 방』(독일출판예정)을 유작으로 남긴 그는 모든 문명에 적응하는 유일한 즐거움을 알았으며 영원한 자유의 비밀을 탐구하며 한시대에 도전한 잊을수 없는 비평가로 남을 것이다.
77년에 「프랑스」 최대의 영광인 「프랑스」대학 교수로 임명된 그는 첫 강의에서 『말한다는 것은 의사교환이 아니라 행동을 구속하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일반화된 제사법이다.
말은 반동적도 아니고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파시즘」이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말하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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