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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탕트」에서 냉전시대로|소련 팽창정책의 발판|지역 한계넘어 「브·독트린」을 시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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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중동과 「아시아」지역의 정세는 뜻하지 않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러한 소련의 행위가 미소관계를 비롯, 동서관계 및 「아시아」정세에 어떠한 변수로 작용할 것인지 본사 특파원들을 통해, 「유럽」미국 및「아시아」의 시각에서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소련이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느냐에 대해 서방쪽에서 보는 눈은 두 갈래다.
그 하나는 제정「러시아」의「피터」대제이래 소련외교가 지향해 온 인도양 연안의 부동항 확보전략이 그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이 회교반란세력에 밀려나게 됨으로써 소련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지역에 반소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자위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프간∼오만만간 회랑 계획도>
부동항 확보전략설은 이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면 그럴 듯하다.
소련이 일단「아프가니스탄」을 확보하고 나면 국경에서 「오만」항까지의 거리는3백 「마일」 밖에 되지 않는다.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갈라져 있는 이 접근로에는 역사적으로 이 두나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발루치스탄」민족이 살고있다.
그러니까 일단 소련이「아프가니스탄」만 확보하면 「발루치스탄」의 독립을 지원해서, 그 댓가로 「과다르」 항구까지의 접근로를 얻어낼 수 있는 길이 틔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정보소식통은 이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오만」만 사이에 50「마일」넓이의 회랑을 확보할 비밀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소련이 인도양에 진출한다면 우선 서방의 석유공급원이 있는 「페르시아」만 일대가 치명적인 압박을 받게되고 동시에 서방에 전략적으로 뿐아니라 교역로로 중요한 인도양의 해상통로가 위협받게 뇐다.
그러나「유럽」의 정부나 언론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위기「시나리오」에 동조하지 않고 소련의 목표가 당장은「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제한된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소련의 침공을 자위행위로 보는 쪽에서는는 부동항 확보론이 서방세계에 그처럼 엄청난 도전이 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를 일축하고 있다.
소련의 그런 정책이 당면할 현지에서의 어려움은 그만두더라도 70년대를 통해 애써 쌓아올린 동서공존체제의 바탕을 허물어뜨리고 동서간에 열전을 각오하면서 팽창정책을 추구할 만큼 소련의 지도층이 갑자기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멸스런 패배·위신회복 하려>
자위론에 따르면 침공경위는 이렇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고 55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한때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서서히 소련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공산 「쿠데타」가 일어난 78년 이전에 이미 몇백명의 소련고문단들이 「아프가니스탄」정부의 중요부서에 배치되어 정책입안에 자문역을 맡았다.
「쿠데타」이후에는 종주국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1천명의 민간인과 4천명의 군사고문관이 파견되어 내정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60%가 가담할 정도로 반란이 확대되고 곳곳에서 소련 고문관들이 길거리에 끌려나가 처형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브레즈네프」는「타라키」대통령을 「모스크바」로 블러 과격파인「아민」수장을 제거하고 개혁을 보다「부드럽게」 추진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지난 9월14일「타라키」가「모스크바」의 지령을 수행하려 하는 자리에서 일이 잘못되어 오히려 「타라키」가 「아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강자로 등장한 「아민」은 더욱 잔학한 탄압정책을 실시했고 반란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 고문관 35명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꽂고 횃불행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면 소련은 「아민」의 공범자로 낙인찍혀 반란군에 의해 모멸스런 패배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 때부더 소련은 「아민」을 제거하느냐, 아니면「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하고 철수하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회교권의 배척 의식한 침공>
소련이 이중 무력침공에 의한 「아민」제거를 택한 이유는 ①자신들이 세워 준 공산정귄이 민중봉기에 의해 붕괴될 경우 소련이 제3세계를 비롯, 동구 공산권에서 위신을 잃게 되고 ②회교국가에서 회교반란군에 의해 밀려날 경우 3천5백만에 달하는 소련내 회교도와「이란」을 위시한 회교국들의 배척을 받게 될 위험 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게 통설이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소련군의 무력침공은 하나의 불길한 선례를 남겼다.
56년의「헝가리」침공 및68년의「체코슬로바키아」침공과 비교할때 이 두 경우는 모두 명백히 소련세력권 안에 들어가는 공산정권이었던데 비해 「아프가니스탄」은 그 세력권 밖에 있는 회색지대에 속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소련세력의「아프리카」침투 양상과 비교하더라도 「앙골라」와 「이디오피아」의 경우는「쿠바」가 전투병력을 제공하고 소련은 소위 민간기술자만을 파견하는 조심성을 보였다.
이에 비해 노골적인 침략군을 동원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소위「브레즈네프·독트린」 이 동구권의 지역적 한계선을 넘어서 더욱 당돌하게 적용된 첫 사례가 되는 셈이다.

<부동항보다는 유고가 더 긴박>
이러한 선례는 무엇보다도 「티토」의 사망을 앞두고 있는「유고슬라비아」의 장래와 관련시켜 볼때 중대한 위험을 안고 있다.
소련은 「티토」가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을 꺾고 다시 친소세력으로 끌어들이려 모종의 행동을 취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만약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소련의 뜻대로 풀려나간다면 「유고」에 대한 그 「모종의 행동」이란 것이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무력침공이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은 오히려 부동항 확보 전략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예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긴박성을 띠는 것이다.,
【런던=장두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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