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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중앙예술」시곡 당선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실업자 『‥….』
천문가 『형씨는 조금전 저기서 떨어져 죽은 사내가 담뱃불을 빌었다는 그 꾀죄죄한 아저씨의 얘기,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실업자 『글쎄요. 』
천문가 (완강하게) 『난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도.』
실업자 『하나도?』
천문가 『그렇습니다. 하나도, 심지어 조금전 내가 형씨에게 들려 준 내 얘기도 남의 얘기를 욺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실업자『정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까?』
천문가 『네, 정말.』
실업자『사실은 나도 금방 형씨에게 들은 얘기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천문가 『아닙니다. 역시 남의 이야기니까요. 나까지도 그런데 오죽하겠어요.』
실업자 (갑자기 의혹에 찬 얼굴로) 『형씨.』 (그에게 바싹 다가앉는다.)
전문가 『…?』
실업자『형씨는 그럼?』
천문가 『?』
실업자 『내가 들러준 내 아내와 나의 얘기마저도…?』
천문가 『……』
실업자 『그렇습니까?』
천문가 (고개를 꺾으며)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실업자(나직이) 『그렇군요.결국 그런 거로군요, 우리는……』
천문가 『그렇습니다. 결국.』
실업자 (허탈하게) 『힘들여 많은 얘기를 나누고….』
천문가 『심지어 자기의 비밀까지도 털어 놨지만….』
실업자『그런게 무슨 소용입니까.』
천문가 『결국엔 아무런 관계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업자 『………』
천문가 『그러길래 최소한 자기만의 비밀이라는 것, 역시 자기만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걸 그랬나 봅니다. 우린 조금 전 죽은 그 사내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누군가에게 열심히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대단한 일 같아도 사실은 자기의 얘기만을 혼자 지껄이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형씨는 형씨의 이야기를, 나는 나의 이야기를, 떨어져 죽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였을 뿐입니다. 얘기의 뒤끝에 위안을 얻어내려 해도 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쓸쓸함이 더할 뿐, 조금 전 그 아저씨, 약속을 어겨 버리건 잘했는지 모릅니다.』
실업자 『….』
천문가『따라서 조금 전 죽은 그 남자, 어쩐지 실패한 것 같지 앉아요?』
실업자 (건성으로) 『네, 어쩐지… (하다가 갑자기 떨쳐 버리듯) 하지만 난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까짓 것, 비밀이니 어쩌니 하는 것 아무래도 좋습니다. 도대체 그런게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상관 없습니다. 그까짓 것 상관 없어요.』
천문가『난…형씨가 부럽습니다.』
잠시 침묵. 두 사람 나란히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다.
천문가 (불현듯)『그런데.』
실업자 『왜 그러세요?』
천문가 『저길 좀 보세요. 거 강변과 건물들…』
실업자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천문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이게 어떻게 된겁니까?』
실업자 (천문가를 보며)
천문가 『확실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실업자 『글쎄요. 난 별로…』
천문가『저기 저 회색으로 피어 오르는 띠 같은 게 뭡니까.』
실업가 『…안개 아닐까요?』
천문가『안개라곤?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실업자 『왜요?』
천문가 『생각해 보세요. 하늘 높은 곳에서 지금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올 시간 아닙니까. 새롭게 저런 안개가 피어 오른다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실업자『형씨 말을 듣고보니 딴은… (열심히 바라보며)하지만 저것 지금 막 저렇게 피어 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저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이지』
천문가 『저 안개 같은 띠가 말입니까?』
실업자 『자세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아, 맞습니다. 그 스모그인가 뭔가하는 게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안개로 착각한 것은』
천문가 『가만 보세요. 어쨌든 저 안개같은 것, 점점 짙어지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지 않아요?』
실업자 (다시 동요되는 듯 불안하게 둘러보며) 『글쌔요.』
천문가 『분명합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실업자 『!』
천문가『저길 보세요. 강이며 둑, 철교,건물들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기 않아요?』
실업자 (열심히) 『무슨 말입니까, 형씨. 이제 곧 아침이 올 시간입니다. 이제 곧 고함을 내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부산이나 여수쯤에서 올라오는 특급 열차가 저 철교를 뚫고 지나 갈 것입니다』
천문가 (생각난 듯) 『특급 열차라고?(다가 앉으며) 형씨, 형씨는 특급열차가 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실업자 『물론이죠. 아침이 오는 시간이니까요.』
천문가 『아침이 오는 것은 정말 자신할 수 있습니까?』
실업자 (점점 다급해진 듯) 『물론입니다. 특급 열차가 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천문가 『특급 열차가 오기 때문에 아침이 올 것이라는 말입니까?』
실업자『그럴 리가, 아침이 오기 때문에 특급 열차가 오는 거겠죠』
천문가『아아. 나는 아무것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군요. 아침도, 특급열차도, 아내마저도…』
그림·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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