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칼럼] 경제정책 일관성 유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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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그의 병력(病歷)을 검토하고, 그가 어떠한 질병에 걸려 있고, 건강상태가 얼마만큼 악화돼 있는가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병을 오진해 외과수술이 필요한 것을 내과적인 처방만으로 치료한다면 그 환자는 일시적으로는 치유가 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성장.고용.물가 그리고 국제수지의 설정된 목표치에서 이탈하고, 경제구조상에 왜곡현상이 발생해 경제의 불안이 조성되면 경제정책은 그 원인을 진단하고 정상으로의 회복을 위한 처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보듯 경제정책의 진단과 처방이 잘못될 경우 정책의 시행착오는 반복되고 이 과정에서 선량한 국민은 경제적 고통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 경제적 고통받는 선량한 국민들

최근 각종 연구기관이 한국경제의 위기가능성을 지적하고 경제5단체가 현 경제상황이 IMF사태 직후보다 더 심각하다고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위기의 요인별 실체를 다시 한번 진단하고 경제정책의 처방 한계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경제 내적인 위기요인으로는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태와 카드채 문제는 분명히 한국경제의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전형이다. 1997년 IMF사태 이후 정부는 기업회계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비교적 건전하다고 평가돼온 재벌기업에서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가 자행됐다는 것은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해당기업의 처리과정도 이해하기 힘들다.

기업의 회계 처리과정에 문제가 발생해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음에도 이 기업을 생존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도 과거와 같이 대마불사의 논리가 적용되는 것인가?

경제정책의 일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현재의 처리방식은 또다시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해외 투자가들의 불신만을 조장할 뿐이다.

카드채 문제로 인해 발생된 최근의 금융불안은 '국민의 정부'의 정책실패와 카드회사들의 과욕이 유발한 것이다. 이것은 지불능력이 없는 경제주체들에게 능력 이상의 소비를 하게 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경제성장의 효과를 달성하려는 정책의 부산물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채무를 통해 능력 이상의 소비를 하게 하면 채무자가 변제능력이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카드사의 손실은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 현재 정부가 발표한 처리방안은 1997년 기아자동차 사태 처리를 연상케 한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위기요인은 주로 유가의 변동추이다. 그러나 지난달 20일 전쟁 개시 이후 유가추이는 하향세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또한 현 상황으로 보아 이른 시일 안에 끝날 것 같다.

과거 우리는 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이후 91년 1월 17일부터 2월 말까지 계속된 전쟁과정에서 한자릿수에서 35달러 이상으로의 유가 변동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국경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이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 韓.美 신뢰회복 빠를수록 좋아

그밖에 경제위기 요인으로 거론되는 북핵 문제, 국가신용등급 하락 가능성, 그리고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고율 상계관세 부과로 시작된 앞으로의 한.미 통상 마찰가능성은 경제적인 문제로 야기됐다기보다는 경제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 같다.

여기에는 그간 북한의 핵개발 대처와 관련해 지속된 한.미 간의 긴장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경제정책의 영역이 아니라 양국 정부 간에 본질적으로 해결돼야 할 과제다.

결국 한국경제는 금융 및 기업에 있어 아직도 이상과 같은 구조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경제위기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원칙적이며, 지속적이고, 일관된 구조정책의 추진이 필요하다. 아울러 정부는 한.미 간에 신뢰관계를 조속히 회복해 경제정책의 안정적 운영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김종인 前청와대 경제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