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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명상] 7. 섬에서 섬을 바라보다-조광호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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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곳 강화에 삶의 터전을 옮겨온 지 두달, 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낙조에 밀려오는 밀물을 바라보려고 마니산 서쪽 해변을 찾는다.

일몰이 가까워지는 시간. 동막리에서 여차리.장화리로 이어지는 해안선 개펄은 자연의 숨소리로 가득하다.

진홍빛에서 붉은 보랏빛으로, 때로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빛으로 바다가 창조주의 거대한 팔레트가 될 때면 어장에서 돌아오는 어부들의 발길이 빨라지고, 개펄에 살고 있는 미물들과 하늘에 날던 새들도 서둘러 제 집을 찾아 가기에 숨 가쁘다.

낯선 개펄에 서서 나는 오늘 저녁, 물안개 속에 가물거리는 작은 섬을 바라본다. 진홍빛 울음을 토해내며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서자 작은 섬도 어느덧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라진 섬의 잔영은 까닭 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도 우주의 작은 섬, 지구라는 떠돌이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저녁 수평선에 사라지는 저 섬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뭉크가 인간실존을 안개낀 해변에 외로운 섬처럼 홀로 서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듯이 오늘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살고 있지만 실은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섬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섬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땅이다. 역사의 모든 유배지에 섬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섬은 단절과 고립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섬은 외로움의 부피만큼 그리움이 존재하는 곳이다.

대지 위에 처음으로 두발로 선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인간)가 망망한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듯이, 인류가 시간을 넘어 영원에 이르는 '초월에의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온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역사도 어쩌면 이 단절과 고립을 극복하고, 외로움과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닐까?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외로운 섬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누구나 외로운 섬이 될 수 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관계가 두절된 인간은 누구나 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라크 소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영국군의 총부리 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소녀와 그 가족들, 화염에 싸인 도심, 인적이 끊긴 황량한 거리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그 가족은 인간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죽음의 섬이었다.

저 수평선에 사라진 섬은 태양이 돋는 아침이면 다시 푸른 수평선에 떠올라, 밤이 되면 빛나는 별이 쏟아지겠지만 세상에 섬이 된 소녀는 앞으로 또 어찌 살아갈까? '충격과 공포'로 얻은 저 승리의 깃발 아래 남는 것이 무엇일까? 승자와 패자의 가슴에 죄책감과 원망으로 남아 영원히 떠도는 '죽음의 섬' 말고 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욕망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한계성'에 도전장을 낸 21세기, 일부 선진국에서 꿈꾸는 그 낙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섬을 만들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섬이 설령 낙원 같은 곳이 된다고 해도 가난하고 소외된 민족들과 연계되지 않은 섬이라면 그들의 낙원은 그들의 유배지가 될 것이다. 그들의 화려한 감옥이 될 것이며 단절과 격리로 소외된 '비극의 섬'이 될 것이다.

어느덧 초저녁 별이 마니산 중턱 하늘에 돋아나고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단절된 바그다드의 밤하늘에도 저 별은 빛나고 있을까? 내 생애의 협곡과 절벽을 돌아, 마른 개펄에 밀려오는 밀물같이 오늘도 그분의 말씀은 내 앞에 '생명의 숨'으로 다가오듯이, 오늘 이 초저녁 무너져내린 바그다드의 밤하늘에는 '충격과 공포'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의 별들이 가득히 피어나고 있을까?

조광호 인천 카톨릭대학 종교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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