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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 잘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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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방송 관계자의 결혼식엔 가수가 축가를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당사자에겐 고역 아닐까. 가수의 노래가 예식장에서 흘러나오면 지나가던 사람들도 기웃거린다. 어수선해지는 건 각오해야 한다. 매니저의 강요인가? ‘디너쇼’도 아니고 ‘런치쇼’를 해야 하는 ‘을’의 처지가 딱하다. 사랑에 빠진(충만) 남녀가 사랑이 빠진(공허) 축가를 듣는 것도 바람직한 풍경이 아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나도 축가를 부탁한 적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갑을 관계’ 아님을 강조) 여가수는 일정을 살피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 거절의 말이 어찌나 재기 넘치던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와 결혼하는데 어찌 축가를 부를 수 있겠어? 눈물이 앞을 가려서 노래가 안 나올 것 같아.”

 재치의 여왕은 바로 노사연씨다. 불후의 명곡 ‘만남’은 당시 축가 1순위였다. 그런데 음미해보면 제목과 달리 가사는 ‘결혼식’용이 아니다. 오히려 애인을 빼앗긴 여성의 절규에 가깝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노씨의 말이 5퍼센트 이상 진담이었다면 ‘만남’이야말로 분위기에 딱 맞는 곡이다. 무심히, 그리고 무수히 합창하며 불렀던 ‘만남’. 비련의 심정으로 들어보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하지만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중략)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로 감정이 증폭된다.

 축가도 시대의 리듬을 탄다. 거의 40년 전 송창식씨가 부른 ‘축가’는 명심보감 수준이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략)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살리라.” ‘살리라’를 ‘살아라’로 바꾸면 주례가 불러도 손색이 없다. 요즘은 이적이 부른 ‘다행이다’가 대세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란다. 감각적이고 실천적이다. 신랑이 직접 부르면 어울릴 노래다.

 마지막으로 하객이 합창하면 좋을 축가도 있다. 오승근씨의 트로트 ‘있을 때 잘해’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하객들에겐 별별 사연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안다. 있을 때는 잊고 지내다가 사라지면 후회되는 것들. 신랑·신부여. 부디 행복이 곁에 있을 때 꽉 잡고 끝까지 가라.

 뒷얘기 하나. 노사연씨는 지금도 친구다. 그의 남편 이무송씨는 넉살이 좋다. 노사연과의 ‘사연’을 좀 부풀려 얘기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형. 정말 축하드려요. 결혼했으면 어떡할 뻔했어?”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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