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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671>|제66화 화교|중국인 습격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만보산사건 급보를 담은 C일보의 호외는 193l년7월2일 저녁과 3일 아침 두 차례에 걸쳐 발행, 배포됐다. 여기 보도된 내용이 일제의 농간에 의한 것임은 아무도 알리 없었다. 한국민들의 분노는 마른나무에 불을 지피듯 무섭게 타올랐다. 소식이 전해진 2일 저녁부터 폭동이 벌어졌다. 화교들에겐 악몽과도 같았던 수난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화교습격이 처음 시작된 곳은 인천이었다. 2일 하오 무리 지어 거리로 뛰쳐나온 한국인들은 닥치는 대로 중국인들을 붙들어 두들겨 패고 상점과 집을 부쉈다. 화교들은 곧 선무동 거류지(청관)로 피신했다.
다음날인 3일엔 서울 종로에서 화교습격이 시작돼 곧 서대문·중구 등 시전역으로 확산됐다. 4일엔 평양·개성·수원 등지에서도 난동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평양에선 중화요릿집 동승루를 20여명의 한국인이 파괴하면서 폭동의 막이 올랐다.
5일부터 평양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거리를 가득 메운 성난 군중은 화교상점과 거주지를 습격했다. 폭력은 더큰 폭력을 낳았다. 습격은 유혈참사로 발전했다. 사형·살해·가옥파괴·재산탈취가 자행됐다.
서울서도 이날 하오8시께 부터 난동이 격화됐다. 인천폭동도 이날 더욱 심해져 총독부는 서울에서 응원경찰대를 긴급 파견했다. 춘천과 선천 등지에서도 습격사태가 벌어졌다.
이어 6일엔 광남포·신의주 등지에서 소요가 났었다.
이렇게 진전된 화교배척사건은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7월10일까지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작은 규모의 배척사태는 지역별로 계속돼 7월 말께에야 완전히 진정됐다. 소요가 일었던 지역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구 전주 울산 마산 수원 춘천 군산 이리 청주 순천 남포 공주 안주 재령 의주 안변 해주 강서 운산 선천 금성 원산 오산 함흥 회령 홍성 구례 양주 순안 이원 사리원 평양 등 화교가 많이 살던 지역에서는 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배척운동이 벌어졌었다.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은 평양과 서울·인천 등지였다. 특히 평양이 가장 심했다. 평양사건 첫날인 4일 하룻동안의 피해만도 가옥파괴 4백개 동에 생사불명 49명에 이르렀다. 부상과 피난민 수는 이브다 훨씬 많았고, 이후 며칠간·피해는 무섭게 불어 사망자만 90명을 넘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기에 화교들은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참변을 당했다. 눈앞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맞아죽는 참상을 목격한 화교들은 부서진 집과 상점을 버리고 중국영사관을 임시대피처로 피신해야 했다. 긴급대피소에 수용된 난민이 서울에만 4천여명, 평양은 5천5백 명이나 되었다.
아예 본국으로 임시 귀환하는 화교들도 많았다. 7월6일 인천에선 1천여 명이 연락선 이통환으로 산 속에 돌아갔고, 7월8일 진남포에서도 공동환이 피난화교를 가득 싣고 산속으로 향했다. 또 9일엔 평양에서 5천여 화교가 총독부가 주선한 화물「트럭」에 실려 육로로 중국에 돌아갔다.
피난 화교들에게 화물「트럭」을 제공하는 등 귀국을 주선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태도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만보산 사건의 발생과 보도 때부터도 그랬지만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제는 은근히 한중 양 국민의 충돌을 조장했었다. 따라서 사태수습의 책임을 져야할 총독부는 한국에서의 화교배척사건을 예방하거나 진압하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하고 일부 난동자들을 검거하긴 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조처에 그쳤다. 오히려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중을 선동했고, 화교들의 교통통신시설 이용을 방해해 사태수습을 지연시켰다. 심지어는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인이 대창을 들고 한국인 불량배와 친일분자들을 이끌고 화교습격에 앞장서기도 했다.
총독부는 또 될 수 있는대로 많은 화교들이 귀국하기를 바랐다. 그들이 돌아가 이곳의 참상을 전하면 만주 등지에서 한국교포들에 대한 보복사태가 일 것이라는 기대에 서였다고 사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평양화교들에게 차편을 주선하는 등 귀국편의를 봐준 것도 이런 속셈에서였다고 풀이된다.
한국 남쪽지방보다는 만주에 가까운 북쪽지방에서, 또 귀국선 편이 편리 항구도시 인천·진남포 등지에서 사태가 더욱 심각했던 것도 일제가 이런 계산아래 사태발전을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귀국이 빨라야 사태의 만주비화가 촉진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화교들이 치른 희생은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엔 3만6천7백여 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는데, 사건 후 중국측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중 1백42명이 사망했고 실종 91명, 중상 5백46명, 재산피해 4백여만원(일화), 각 지방 영사관에 수용한 난민은 1만6천8명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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