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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가치」높아 대접은 좋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리간」에 특파된 본사 이수근 특파원은 납치범의 손에서 풀려난 신필호씨의 수기를 긴급 입수, 본사에 보내왔다. <편집자주>
나는 29일 아침8시30분 장비부품관계로 「다바오」에서 「마카리오」씨와 함께 「일리간」에서 15㎞떨어진 산중턱 「낭카」작업현장을 둘러보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모든 「픽업」차가 작업현장에서 1백여m떨어진 「하이웨이」로 들어가려던 순간 5명의 청년이 손짓으로 차를 태워달라며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 3명이 적재함에 타고 나머지 2명이 내옆으로 오더니 권총을 꺼내고 우리들을 좌석 가운데로 밀어붙였다.
범인 중 하나가 「핸들」을 잡고 순식간에 「일리간」시와는 반대방향으로 급히 달려 하마터면 차가 전복될 뻔하기도 했다.
무장군인들이 탄 차가 지나가도 그들은 나의 옆구리에 총을 겨워 꼼짝할 수 없었고 검문초소도 2개쯤 자나갔는데도 검문을 하지 않았다.
차가 전복이라도 하여 군인들 눈에 띄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들은 한 15분쯤 후에 포장이 안된 조그만 샛길로 들어서 한참 산 위로 몰고 가다가 우리들을 내리게 했다.
범인 중 두 명은 차를 몰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다른 3명은 우리들을 앞뒤에서 호위하면서 대나무로 빽빽하여 하늘이 안보일 정도의 깊은 계곡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 어떤 마을에서 안장도 없는 말을 타라고 해서 타기로 했지만 엉덩이가 배겨서 걷는 쪽을 택했다.
이런 길을 4시간 이상 걸어 첫 번째의 은신처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고 나 또한 불안과 공포로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첫 번째 은신처의 마을은 못하나 쓰지 않고 대나무로만 만든 원두막 같은 집이 서너 채 드문드문 있는 정도.
마을근처에 다다르자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회교도 청년들이 하나 들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3일간을 머물렀는데 첫날밤에 두목 「와타리」가 편지를 쓰라고 해서 한글로 또박또박 썼다.
그러나 손이 떨려 잘 쓰여지지가 않았다. 5, 6명의 청년이 항상 나를 감시했으며 풀려날 때까지 두목 「와타리」와 부두목으로 보이는 22세 가량의 청년과 행동과 잠자리를 늘 같이했다.
나는 피납되어 있는 동안 어떻게 하든 그들의 환심을 사서 풀려 나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들의 의심을 살 행동을 일체 하지 않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하게 행동했다.
그들도 나를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서인지는 몰라도 때리거나 못살게 구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를 늦추고 나에게 비교적 호감을 갖고 대했다.
나중에는 나에게 총을 줄 때도 있을 만큼 호감을 보여왔지만 나는 그런 행동이 나를 시험하는 것으로 여겨 총을 만지기조차 하지 않았다.
실제로 몇 명 정도는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나도 살아날 수가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꾹 눌러 앉았다.
그들은 나에게 남광도건의 박화춘씨가 납치되었던 「코타바토」에서 금년 초 남광토건의 기술자 2명이 회교도들의 공격을 받아 각각 사살과 중상을 당했다는 얘기를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납치되어 좀 마음이 가라앉을 무렵에 『나는 단지 한국사람인데 내가 왜 산에 와야 하는가, 이것은 너희들과 정부간의 문제가 아니냐. 나를 납치한 것은 국제문제가 아니잖느냐』고 대들었더니 그들이 『너를 죽이면 우리도 모두 죽게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그 나는 이사람들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같은 것을 갖게되었다.
11월2일 두 번째로 회사에 편지를 보낼 때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회사측에 확인시키기 위해 차고있던 「세이코」시계를 편지와 함께 보냈다. 회사에서는 이것을 받고 이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이 반도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전력으로 나의 구출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협상창구가 열린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어떤 내색을 할수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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