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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666>|제66화 화교(41)|중국음식 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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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사원 얘기를 끝맺으면서 두어가지 일화를 더 들어보자.
48년 5·10총선 후 제헌국회의원들의 당선축하 「파티」가 아사원에서 자주 열렸다. 그해5월14일의 일이다. 몇몇 의원의 축하「파티」가 공교롭게도 이북에서 송전되던 전기가 끊기던 날 열리게 됐다.
이날 밤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자 참석했던 한 의원이 물었다.
『불이 왜 안 들어오지?』
이 물음에 한 기생이 『어머, 국회의원이 이북서 송전 끊은 것도 모르고 계셨어요!』라고 대꾸했다.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의기양양해 하던 이 의원은 기생의 이런 반농담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국회의원을 뭘로 아느냐』고 호통을 치며 상을 엎고 그 기생을 혼내주었다.
자유당시절 한때 아사원은 깡패들의 집합소가 된 적도 있었다. 수십 명씩 몰려와 큰 방에서 기생들을 끼고 술잔치를 벌이곤 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당시 반공예술인단 단장이던 임화수였다. 임은 가끔 밤늦게 나타나 먼저 술상을 벌이고 있던 부하들과 어울리곤 했는데 기생들과 종업원들에게 「팁」을 잘 줘 기생들은 그를 은근히 기다렸다는 얘기다.
한국인손님들과 중국음식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요즘엔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져 사정이 전혀 다르지만 사실 50년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손님들은 중화요리에 관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중국집은 곧 「자장면집」이어서 면류를 찾는 것이 보통이었고 기분을 내 요리를 시킨다 하면 탕수육 정도가 고작이었다.
변화가 있다해도 잡채·「뎀뿌라」·해삼탕·「라조기」정도였다.
탕수육 같은 요리는 일품음식은 아니다. 사실 중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한국인 중에도 중화요리를 잘 아는 손님들은 탕수육은 전혀 시키지 않았으며 간혹 연회등에 탕수육이 섞여 들어가면 『바가지를 씌운다』며 주인을 불러 야단치곤 했다.
그러나 일반손님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아무리 비싸게 차린 잔치라도 탕수육이 빠지면「엉터리」라고 나무랐다. 내가 아는 한 중국집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60년께의 일이다. 꽤나 돈 많은 갑부가 거래선 몇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 미리 주인에게 당부하기를 『귀한 손님이니 최고급 요리로만 준비하라』며 「메뉴」는 보지도 않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주인은 각종 해물류와 고기를 써서 일품요리들을 한상 차려 들어갔다.
조금 지나 방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는 질책이었다. 탕수육도 빠지고 「란자완쓰」도 「라조기」도 없으니 웬일이냐는 얘기였다. 하는 수 없이 주인은 이 요리들을 추가로 만들어 들여보냈다.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고급요리를 시켰다가 낭패하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 흔히 고급요리 하면 보통 「샥스핀」과 제비집 요리를 든다. 사실 제 맛을 아는 사람 아니면 이런 요리의 참 맛을 가리기 어려울 뿐더러 제대로 만든 것도 맛있게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호기심으로 시켜놓고는 다 먹지도 못하고 일어서는 경우도 가끔 본다.
사실 「샥스핀」도 만드는 법에 따라 20여 가지로 세분되며 닭과 돼지고기 요리도 각기 30여 가지씩 된다. 제비집도 원래 한국의 재료로는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날림요리에 속기 쉽다.
또 돼지고기요리를 굳이 쇠고기로 해달라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선 쇠고기를 더 좋은 것으로 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중국요리는 돼지고기로 만들어야 제 맛이다. 재료뿐 아니라 기름도 돼지기름을 사용해야 한다. 면실유 같은 식물성기름을 쓰면 또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화요리에 돼지고기를 많이 쓰게된 유래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리 고향 산동성의 예를 보면 돼지는 많이 길렀지만 소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농사철에 간혹 소를 빌어와 쓸 때면 동네아이들이 구경하러 모여들 정도였다. 값도 오히려 돼지고기가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아사원이 문닫은 뒤 태화관·대관원·대려도 등 화교경영의 대표적 중화요리집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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