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가기 싫은 부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이민을 앞둔 7순 할아버지가 한강물에 빠져 죽었다. 자식들에게 짐 될게 안스러워서 였다고 한다.
지난 6월초에도 아들의 이민 길에 짐이 된다하여 8순의 할머니가 곱게 소복단장하고 목숨을 끊었다.
부모에게 효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분들을 죽음의 길로 재촉한 셈이 되었다. 어버이의 마음을 자식들은 영 헤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의 민화에 이런 게 있다.
고려장 지내려고,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산 속으로 끌고 갔다. 뒤따라가면서 어머니가 나무 가지를 꺾어나갔다.
왜 그러시느냐고 아들이 묻자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표시을 해놓는 것이란다』고 어머니가 대답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났다. 따라서 아들이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 내려왔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우리 나라의 민화는 끝이 조금 다르다. 할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에 손자가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지게를 버리고 돌아서자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주워 자기 등에 졌다.
왜 그러느냐고 아버지가 묻자 아들은 대답했다. 『이 다음에 아버지를 버릴 때 쓰려고요』라고.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버린 할머니를 다시 업고 돌아왔다.
아무리 자식의 효심이 깊어도 어버이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르지는 못한다.
공기 좋고 살기 좋은 미국에서 좋은 약에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잡수시게 하겠다는 딸의 효심에는 조금도 사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악처라 해도 효자보다 낫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다. 호강이나 편한 살림만으로 노인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노인들의 마음은 상하기 쉽다. 특히 나 자기가 아무 쓸모도 없는 군식구라는 생각을 뭣보다도 두려워한다.
할머니는 손자들의 뒷바라지라도 할 수 있고 집안 일도 돌봐줄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때에만 살맛이 난다. 특히 나 노인은 어린이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희노애락을 느끼게 된다.
부모가 늙은 다음에 자식에게 얹혀 산다고 조금도 군식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 안에서의 일이다. 문물이며 인식이 전혀 다른 미국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 생각이 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이런 노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자식의 잘못만은 아니다. 세상이 그만큼 달라진 것이다. 「군식구」라는 소외감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든 세상이 탓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