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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창간 14돌 기념 특별기획 의식조사를 읽고|전병재(사회학·현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인구문제 해결에 도움되게>
이번 중앙일보사가 창간 14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행한 재미한국인의 생활실태조사는 우리나라의 인구문제해결을 위해서 이민과 같은 적극적인 정책도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아야할 단계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라 하겠다.
사실 여태까지 우리정부에서는 이민정책에 어떤 일관된 원칙을 분명히 내세운 바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이민「붐」을 타고 무작정 쏟아져 나간 사람들의 결과가 본인들을 위해서나 우리나라를 위해서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정부에서 이민을 권장한다면 우리사회의 어떤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권장할 것이며, 또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득과 실이 무엇이며, 어떤 각오를 세우고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원칙과 준비가 있었어야 했다.
이번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 중 66%가 대학출신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사무직에 종사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는 노무직으로 전락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이민을 가서는 안될 사람들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여태까지의 이민이 개척이민이었느냐 아니면 도피이민이었느냐 하는 점도 이번 조사결과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의 평균 이민 햇수가 아직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 주택 소유자가 전체의 70%에 가깝다는 것은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열심히 일해서 집 장만을 했겠지만 개중에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외화를 많이 가지고 나간 사람들도 상당수에 이를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영업자들 중에 고소득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서 미국에서도 처음부터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달러」를 가지고 가는 이민이 과연 개척이민이냐 도피이민이냐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또 이들의 72%가 자녀의 국제결혼을 반대하며 60%가 노후를 한국에 돌아와서 보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뼈를 새 땅에 묻을 각오로 이민을 떠난 것은 아닌 듯 하다.

<제도로 못 고치는 사회장벽>
이번 조사결과 속에는 이민가족들의 평균수입이 미국 전체가구의 수입보다 높게 나타난 것이라든지 모국의 경제발전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밝은 면도 부각되고 있어서 무척 반가운 일이지만, 장차의 이민정책의 구체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역시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분석해 보는 일이겠다.
이들이 처음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언어문제인데 앞으로는 이민희망자에게 정부에서 어학훈련을 시켜서 초기 정착단계에서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특히 재미있는 현상은 이민생활이 10년쯤 되면 언어문제보다는 인종차별의 문제가 더 큰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인종차별의 문제는 당대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2세·3세로 내려갈수록 더 심각해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의 성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특히 남북전쟁 이후로 가장 고민해오고 있는 사회문제가 바로 이 인종차별의 문제다. 그러나 흑인들의 피나는 투쟁과 백인들의 자각의 결과 이제 미국에서의 소수인종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뿐 아니라 최근에 와서는 연방정부가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소수 인종집단의 사회적 이익을 보호해 주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한국이민들이 느끼는 인종차별이란 제도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느끼게 되는 편견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편견이 소수인종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의 질을 저하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백인들이 다른 민족들을 사회적으로 대둥하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은 제도적인 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매우 미묘한 인간적인 문제다.

<10년 지나면 인종차별 실감>
피부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가까이 사귀기 싫다는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민 1세들이야 자기가 택한 삶이었으니 도리가 없다고 체념을 한다든지 고국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이러한 심리적 불만을 보장받을 길을 모색해 보자든지 하겠지만 2세나 3세들에게는 고국동포와의 유대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남들과 다른 피부색깔 뿐이다.
따라서 자식들의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부모에 대한 불평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결과 중 또 한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이번 조사 응답자 중 24%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했다고 한 사실이다. 이는 현대 우리사회에서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대책이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의 목적이 자녀들의 교육때문이라고 한 사람들의 교육관이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하는 점은 매우 궁금하다. 참다운 교육이란 영어나 가르치고 미국의 명문대학 졸업장을 안겨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로 만드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교육이 미국이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논리속에는 큰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
이번 조사결과를 보아도 이들의 미국사회속에서의 자녀교육에 대한 만족도가 10년쯤 지난 사람들 사이에서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녀교육 때문에 이민을 간다는 사람들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고국의 교육제도에 불만>
이민을 가는 것을 시집을 가는 것에 비유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시집간 딸이 시집살이를 잘하면 친정의 체면도 서고 시집에서도 귀여움을 받아서 모두가 행복해지지만 과년한 딸자식이 친정이 싫다고 도망가서 결혼을 한 후 친정험담이나 시집에서 터뜨리고 있다면 그러한 며느리를 귀하게 여길 시집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딸자식은 친정부모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불효자식이다.
시집가는 당사자는 친정을 잊을 수 없겠지만 시집산소에 뼈를 묻을 각오로 가서 열심히 살면 그것이 곧 친정을 위하는 길이다. 시집간 딸을 친정부모가 간섭을 해서도 안되지만 당사자도 새집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번 조사는 시집생활의 고충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참으로 유익한 연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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