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벽에 그려진 허수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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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그려진 허수아비/이충기 지음, 작가마을, 6천원

27세 때인 1980년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서 지하철 공사장을 지나다 추락하는 사고로 23년째 누워서만 생활하고 있는 이충기 시인의 네번째 시집.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볼펜 끝으로 컴퓨터 자판을 고통스레 눌러 쓴 시들이지만 뜻밖에도 너그럽고 아름답다.

"내 몸에도/곰팡이가 피었으면 싶다/단 한 사람일지라도/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조금씩 썩어가고 싶다/아무도 모르게/내 삶이 끝나는/그 날과 그 시간에 이르기까지"('메주'전문)

작은 방에 누워서만 지내지만 그래도 말벗이 되어주고 돌봐주는 대학 동창들과 그의 시를 좋아하는 학생들도 많이 찾아온다. 그들을 위해, 모든 독자들을 위해 잘 발효된 메주 같은 시가 돼주고 싶다는 것인가. 27세의 젊음 그대로에서 멈춰 그 청춘과 사랑을 전하는 시들은 솔직하여 쉽고도 아름답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우리는 한 길을 걷는 나그네 아닌가요/지친 발걸음 잠시 멈추고/활짝 열어놓은 대문 안으로/공기처럼 스스럼없이 들어오세요"('대문을 열어놓았어요'중)라며 독자들을 그의 방,시집으로 초대하고 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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