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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논쟁|상궤를 벗어나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장마가 길면 음습한 바람에 여기저기 곰팡이가 슨다. 머리가 무겁고 속이 메스껍다.
때를 맞추듯 장마철같은 문화풍토에 음습한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4월 신문들은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연구원교환계획에 따라 일본을 다녀온 경희대무용과 김백봉교수의 「인터뷰」기사를 꽤들 크게 실었다.
일본신사에 전해지고 있는 의식무용이 한국에서 전수되어 보존된 것임을 확인했고 재도입해야겠다는 발언이 주목을 끌었던 것이리라. 무용에 대한 학문적발표가 이렇게 사회적인 관심으로 확대되기는 극히 드문 일이다. 따라서 무용전문지인 『춤』의 주간인 조동화씨의 시론으로 권두에서 반론을 편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김백봉씨는 논쟁을 벌이는 대신 조씨를 걸어 「명예훼손」으로 형사소송을 제기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윌간음악」지 5월호는 임원식씨가 「베를린·심퍼니」공연을 객원지휘하면서 윤이상의 초연곡인 『무악』을 지휘했다고 해서 임씨를 용공행위로 몰아세웠다.
이보다 앞서 문학계에서는 한 노작가가 전후세대에 속하는 젊은 작가·평론가 「그룹」을 규탄해서 논쟁이 벌어졌었다.
우발적으로 보이는 이런 고발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보게 된다.
모두가 학문적인, 또는 예술적인 관심에서라기 보다는 「나라의 법을 어긴 인간」으로 상대방을 고발하거나 단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점이다.
오늘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할 뿐인 「나라의 법」보다는 높은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과 영원성을 추구해야할 예술인들이 한결같이 법의 발동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음습한 바람은, 그러나 현명한 법관과 보안당국의 거중조정, 그리고 침묵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미리 공관의 양해가 되었던 임원식씨에게 하자가 있을수 없고, 전후세대인 작가와 평론가들이 나라가 금하고 구독이 불가능한 분야를 공부할수 있었을리가 없다. 무용계의 피소사건은 표현이 과격했다는 사과문으로 양자를 화해시켰다. 하기야 학문논쟁은 법이 재판할수 없는 것이라고 핀잔을 주어보냈더라면 더욱 명판관의 칭송을 들었을는지드 모른다. 그런데 음습한 바람은 다시 고개를 든다. 『한국연극』 7월호에 안제승씨가 다시 「고려무사건」논고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안씨는 김백봉씨와 같은 경희대의 무용과장이자 그 부군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교수사회에서는 아름다운 부부애라고 해서, 이를테면 학술논쟁의 대리답안이 가능한 것인지 알수 없다. 그러나 교수사회를 모르는 나로서는 학생에게 금지된 대리답안은 교수들에게도 금지되어야할 것이 아니냐는 상식론을 펴볼뿐이다.
그리고 이왐이면 법에 호소하기전에 대리답안으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었는지, 또 김백봉씨는 조동화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사과문을 받기까지 했는데, 교수사회에서는 자기가 써야할 논고를 남편이 대신해도 아내는 명예훼손의 굴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러지들 좀 말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이 시평을 쓰기로한 날, 어느 조간신문에는 『오늘의 시대정신은 뻔뻔하고 몰염치한 사람만이 서늘함을 누릴 수 있다』 는 소설가 조해일씨의 「에세이」가 실려있었다.
그리고 「노벨」상을 거절한「사르트르」나 서독연방정부의 최고훈장을 거부한 「하인리히·윌」·「귄터· 그라스」·「지그프리트·렌츠」등의 대작가들은 기존사회의 체제를 거부한다기보다 이에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기존체제에 꾸준히 영향을 끼치는 위치와 자유를 확보하면서 「산다」는 문제보다 「어떻게 살 것이냐」를 추구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고자 한다는 「파리」특파원의 글도 실려있었다.
우리에게도 문화예술인의 그와같은 긍지와 좌표가 아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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