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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서 2000㎞ … 길에서 시든 15세 아메리칸 드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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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달 18일 미국 텍사스주 브라운스빌 국경수비대 임시 보호소에서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다 붙잡힌 미성년자들이 잠들어있다. [브라운스빌 AP=뉴시스]

“미국에 가서 엄마 간질병 고칠 돈을 벌어올게요”. 힐베르토 라모스(15)는 5월 17일 이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났다. 과테말라 산악지대의 작은 마을인 산호세 라스 플로레스에서 미국 텍사스까지 2000㎞에 달하는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었다. 혁대 안에 자신이 미성년자임을 입증할 출생증명서와 시카고에 사는 형의 전화번호를 단단히 숨겼다. 아껴 신던 카우보이 부츠는 먼 길에 망가질 수 있어 집에 고이 보관했다. 울기만 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목에 흰색 십자가 묵주를 걸어줬다.

 약 한 달 후인 지난달 15일, 힐베르토는 미국 텍사스 사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미국 국경검문소를 불과 1.6㎞ 앞에 두고 열사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어머니의 묵주 덕에 신원 확인이 수월했다. 힐베르토의 아버지는 AP 통신 인터뷰에서 “아들을 미국에 보내기 위해 5400달러의 빚을 졌다”고 말했다.

 미국 남서쪽 멕시코 국경 지역엔 힐베르토와 같은 미성년 밀입국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는 2000년 이후 감소 추세인 성인 밀입국 추이와는 정반대 현상이다. 지난해 혼자 미국 멕시코 국경을 넘다 붙잡힌 17세 미만 미성년자는 2만6000여명이었다. 하지만 올해엔 지난달 15일까지 2배에 달하는 5만2000여명이 월경을 시도하다 검거됐다. 하루에 4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목숨을 건 ‘나홀로 미국행’을 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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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베르토는 그나마 생사가 확인된 ‘운 좋은’ 경우다. 길에서 죽어 영영 소식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이민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갑자스러운 미성년 밀입국자 증가는 “미국이 아이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생긴 현상이다. 숨진 힐베르토의 가족도 이를 믿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미성년자의 추방을 결정하기 전 미국 내 친척집에서 지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연고 없는 미성년자들은 아동보호소나 위탁가족의 보호를 받게 된다. 판결까지 수년이 걸려 이 기간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도 있다. 국경지대에서 밀입국을 알선하는 ‘코요테 조직’은 이런 사실을 부풀려 전하면서 미성년자의 입국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 경기 침체로 성인 노동력 유입이 줄자 ‘미성년 입국 알선’이라는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이들 알선업체들은 입국 과정에서 폭력은 물론 살인까지 저지른다. 밀입국을 희망하는 아이들을 볼모로 부모들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유화적 이민 정책이 아이들을 범죄 조직의 표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이 “부모의 법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표 직후 중미의 가난한 부모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는 사례가 늘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에서 추방되거나 국경 마을 잔류를 택하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범죄조직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코요테를 돕는 ‘코요티요’(작은 코요테)로 성장한다. 성매매를 하거나 마약 운반 등 위험한 심부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악화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해결책 마련에 나섰다. 그는 지난달 26일 “제발 아이들을 보내지 말라. 미국에 혼자 아이를 보내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고 ABC와의 인터뷰에서 호소 했다. 또 의회에 20억 달러를 요청해 미성년자 불법입국 문제 해결에 쓸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몰려드는 어린 입국자들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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