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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역하는 번역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 문학작품은 그것이 쓰여진 지역적 특수성과 시대적 배경에서 독립될 수는 없다.
토속적인 요소와 시대적감각이 언제나 문학작품 속에 투영되기 마련인 것이다.
예컨대 현진건의『불』이 1910년대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과 결혼제도, 여성의 사회적 위치등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나, 김동리의『무녀도』가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 재래교인 토속신앙이 마찰하는 과정을 그려 우리근대정신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뜻에서 문학은 사회적·역사적 현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 문학작품의 영속하는 예술적 업적은 이러한 토속적 역사적 가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여건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전제하고 있다.
『불』과『무녀도』에 나타난 주제는 1910년대와 20년대의 변천기적 시대에만 해당하는 정열일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진리일 수 있는 감정이며, 사회적 여건을 초월하여 서구나 그밖의 세계 어느곳에서도 감동을 주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보편성의 시험은 한 문학작품을 다른 모습, 다른 의상으로 바꾸어 놓았을 때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한 작가가 자국내에서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조명을 받아 보물 이상으로 확대되고 미화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일단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었을 경우에는 자국어에 붙어있던 장식이 제거되어 본래의 제 모습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괴테」는 이러한 현상을 상미적으로『습득물』이라는 시에서 꽃을 이식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한포기의 아름다운 꽃을 숲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그의 정원에 옮겨 심었어도 되살아나는 원천적인 힘, 바로 이것이 한 작품을 외국어라는 이질적인 풍토에 옮겨심어도 본래의 모습대로 되살아나게 하는 보편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한 문학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그 작품속에 들어있는 보편성의 진리나 예술적 향훈이 짙으면 원작의 모습이 크게 손색없이 재생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파스테르나트」가「세이스피어」를 번역하고,「에즈러·파운드」가 중국시를 영역하고,「로버트·로월」이「보들레르」「랭보」「하이네」같은 시인들을 「모방」이라는 이름으로 옮겨 성공을 거든 예가 여기 해당한다.
영어로 이식된 이백이나「보들레르」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원작의 훌륭한 모습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원작의 보편성이 가지는 힘이 언어라는 제약을 넘어설 수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문학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김승옥의『서울 1964년 겨울』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가 마치 번역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우리는 이제 한번쯤 반성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우리 문화와 습속과 언어에 익숙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하여 원작의 모습을 엄청나게 훼손한 서툰 번역이 가령「괴테」의 「꽃」을 옮기면서 서투르게 뿌리까지 잘라버린 예도 있으며 마치「번역은 반역」이라는 속담을, 번역문학은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다는 안이한 태도로 착각하여 번역문학의 예술성과 창조성을 파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원작과 번역된 작품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없을 수 없지만, 마치 싱싱한 딸기를 신딸시「잼」으로 만들어 버린 서문 번역이 원작에 대해 져야 될 도의적 책임은 무거운 것이 사실이다. 인류의 지성사에 가장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번역 문학이 우리나라에서는 문학의 영역에 이르지 못한 유감스러운 상황이 크게 반성되어야 하는 점은 누구도 부정못할 것이다.
그러나『이춘풍이 간방에 춘심이 머리를 얹었다』는 대목이『이춘풍이라는 남자가 미용사가 어제밤 춘심이라는 여자(기녀의「뉘앙스」가 제거되어)의 머리「스타일」을 바꿨다』로 번역되었어도, 원작이 갖는 주제가 감동적이며 지성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얼마간의 오역과 다소 서투른 문학적 감수성이 끼칠 수 있는 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영어로만 번역이 되면 금세「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애적인 생각이 어느 만큼이나 타당성을 띤 것인지? 이제 우리 작가들은 모두 문학활동을 보다 넓은 시야에서 내다볼 필요성을 느껴야 할 것이 아닐까?
1910년대 최남선 이광수 등 소년문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된 우리 현대문학은 서구의 문학을 모방 수입한지 겨우 60년정도의 연륜밖에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대작을 낼 수 있는 노력을 보다 긴 안목으로 갖추면서 한나라의 위대한 문학전통이 형성되는 데에는 수백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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