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순수비」발견|4백95년에 건립…진흥왕비보다 반세기앞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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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단국대 조사단>충북 중원군 가금면 입석부락서
5세기말 고구려문자왕이 남한강변의 충주까지 내려와서 세운 순수비가 발견됐다. 삼국정립시대의 고구려 비석이 남쪽에서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는 것으로 해석돼 단양 적성비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사학계는 또 새로운 대발전의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9일 단국대 고적조사단(단장 정영호박물관장)은 충북중원군가금면용전리 입석부락에 있는 선돌을 조사하기 위해 교수 10명을 급파, 비문을 대충 판독해냄으로써 서기495년에 세운 고구려비석임을확인했다.
『을해오월일고려대왕』으로 시작된 이 비문은 당초엔 신라때 비석이 아닐까 기대했으나 뜻밖에 신라비의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반면 고구려의 관등과 성이름등이 나와 더큰 개가를 올리게 됐다.
머리돌(개석)도 없이 4각석주형의 자연석을 이용해 흡사 광개토왕비(현재만주소재·414년건립) 에 비견되는 이 비석은 글씨체 역시 그와 비슷한 예서체. 그 내용에는 『전부대사자』『○성도사』등 고구려의 전형적인 신분과 관등이 세군데나 나오고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고모루성』이 보일뿐더러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중인』등 과거 신라땅에 있던 지배계급과 주민들의 이야기가 여러군데 적혀 있어 고구려 비석임을 한층 굳혀주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장수왕척경비 정도로 보고있으나 다른 일부에선 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문자왕의 남진순수비라 주장되고 있다.
즉『상하상태수』란 귀절은 왕아래 배석한 여러 중신을 뜻하며『수자』는 바로 그 수행원들이다.
또 『동내』는 고구려에서 동남으로 내려왔을 때 흔히 쓴 용어이며 『신나…진세』는 새 통치지역에대한 회유라 해석되는 것이다.
특히 비문의『신유년』은 고구려가 한껏 팽창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략 했던 장수왕 69년(481·신라소지3)에 해당한다. 또 『개노』가 백제의 개로왕이라면 그는 장수왕 63년에 국토 한성을뺏기고 살해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 수년후의『을해』에 해당하는 문자왕4년에는 왕이 새로 얻은 남쪽땅읕 순수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삼국사기) 이들비문의 귀절은 부왕의 위업까지 기재한것으로 보인다.
높이 1m35cm의 이 화강석은 파손이 없는편이나 1천5백년간 풍우에 시달려 거의 글씨를 알아볼수 없어 주민들조차 예사 선돌로 여겨왔다. 조사단은 탁본에 의해 가까스로 글자를 찾아냈으나 4백여자(26자 17행)중 1백50여자를 읽었을 뿐이다.
고구려가 충주지방을 점거, 국원성을 설치한 것은 장수왕63년(475)백제수도 한성함락 이후이며 이어 481년 489년 492년에 걸쳐 소백산맥 지역에서 싸움을 벌였고 문자왕3년(495년)에는 신라가 패해 개경으로 후퇴했다는 기록이있다. 그러나 6세기중엽 신라진흥왕초년에는 한강이남을 신라가 뺏음으로써 충주지역 점거는 약70년간으로 보인다. <이종석·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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