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크래프트 비어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의 한 크래프트 비어 펍에서 ‘얼반테이너’ 직원들이 퇴근 후 맥주를 마시며 펍 크롤링을 즐기고 있다.

18일 저녁,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한 맥주 전문점이 북적거린다. 밤이 되자 가게 밖까지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골목이 장관을 이룬다. 이 골목의 가게에서 한 달 동안 팔린 맥주는 2만5000잔이 넘는다. 주말·평일 할 것 없이 매일 저녁 많은 사람이 이 골목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래프트 비어’에 답이 있었다.

크래프트 비어는 소규모(연 60~300kL) 제조설비를 갖춘 양조장에서 독창적인 레시피를 갖고 공들여 만든 맥주를 말한다. ‘수제 맥주’‘하우스 맥주’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념이 다르다. 브루마스터이자 크래프트 비어 펍 ‘사계’를 운영하고 있는 김만제 대표는 “크래프트 비어는 수제로, 집에서 만드는 맥주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맛의 대기업 맥주와 달리 독특한 레시피를 바탕으로 만든, 개성 있는 맛의 맥주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와인·커피처럼 다양한 맛의 크래프트 비어

그동안 우리나라 맥주는 ‘카스’와 ‘하이트’ 등 대기업에서 생산된 맥주가 대부분이었다. 모두 청량감을 앞세운 라거(저온에서 하면발효 시킨 맥주)다. 하지만 맥주는 라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류가 수백·수천 가지가 넘는다. 김대표는 “맥주는 물·맥아·홉·효모의 네 가지 기본 재료가 얼마나 어떻게 들어가는지, 어떤 향신료를 첨가하는지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와인·커피와 마찬가지로 제조법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맥주를 제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맥주를 만드는 사람이 자신만의 노하우에 따라 다양한 성분을 넣어서 맛을 개발하는 것이 크래프트 비어의 핵심인 것이다.

크래프트 비어는 라거 일색이던 우리나라 맥주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라거 맥주만을 만들던 대기업도 까다로워진(?) 소비자들의 입맛을 반영해 앞다퉈 에일 맥주를 출시하고 있다. 그만큼 맥주의 ‘맛’을 중시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래프트 비어가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를 즐기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크래프트 비어 매니어들의 대표적인 문화가 바로 펍크롤링(Pub Crawling)이다. 크래프트 비어 판매점인 ‘펍’과 순례한다는 의미의 ‘크롤링’이 합쳐진 말로 ‘여러 펍을 순례하며 맥주를 맛보는 행위’를 뜻한다. 매니어들에게 펍이 모여있는 지역은 그야말로 ‘성지(聖地)’다. 이들에게 펍 크롤링은 일종의 순례행위로 통한다. 주로 저녁 6~7시부터 시작해 5~6곳의 펍을 방문한다. 한 펍당 자체 개발한 레시피의 맥주를 한두 가지씩 마시며 이동해 밤 10~11시 즈음‘순례’를 마친다.

직장인 김재환(35)씨는 “새로운 레시피의 맥주가 나왔다는 펍을 찾아 맛보는 것을 즐긴다”며 “얼마 전엔 동호회 사람들과 신사동 가로수길부터 시작해 강남·종로·홍대까지 장거리 펍 크롤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간디자인&브랜딩 기업인 ‘얼반테이너’는 퇴근 후 직원들끼리 펍 크롤링을 자주 즐긴다. 마케팅 디렉터 이규식(37)씨는 “펍 크롤링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맛을 음미하고 분위기를 즐기는 문화”라며 “동료들과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자주 함께하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하고 관계도 더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5~6곳 펍 돌며 맥주 맛보는 사람들

각기 다른 레시피로 만들어진 ‘사계’의 크래프트 비어.

펍 크롤링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알아두면 도움이 될까. 크래프트 비어 펍‘더부스’를 운영하고 있는 양성후 대표는 “크래프트 맥주는 홉과 맥아의 종류, 제조 과정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라 생소한 맛이 나는 맥주도 많다. 하지만 처음 마셨을 때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더 이상 시도하지 않으면 평생 자신의 입맛을 사로잡는 맥주를 만날 수 없다. 여러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에게 맞는 맥주를 찾는 과정이 바로 펍 크롤링의 재미”라고 조언했다.

<글=신도희 기자 toy@joongang.co.kr, 사진="김현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