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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미국도 외면한 아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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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일구
강일구 기자 중앙일보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강일구]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아베 정권의 이런 행동은 결국에는 하늘 보고 침 뱉기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될 것이다.”

 1993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발표 당시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국 외무부 고위 관계자가 지난 20일 이른바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를 보고 한 말이다.

 일본 정부는 검증 보고서를 내면서 마치 고노 담화가 한국 측 요구를 담아서 낸 보고서인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고노 담화 흔들기’다. 그러면서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고노 담화 계승 의지엔 변함이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일본이 이런 이중적 태도를 보인 이유는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우익 세력을 의식해 ‘부정’이라도 있었던 듯 검증을 시작했지만, 고노 담화의 정당성을 부정할 증거는 찾지 못해 변죽만 올리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당초 일본의 우익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신빙성을 걸고 넘어졌다. 그런데 정작 보고서는 이런 시비를 붙을 만한 대목이 없었다. 93년 7월 26~30일 진행된 ‘청취조사’에 대해 보고서는 “일부 피해자들은 담담하게 진술했고, 기억이 혼재된 이들도 있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구체적인 증언 내용도 담지 않았다. 이는 ‘못 믿을 증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뿐더러 10대 때 당한 성폭력을 낯선 가해국 정부 관계자들 앞에서 회고해야 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은 전혀 감안하지 않은 자의적 판단일 뿐이다.

 피해자 증언의 신뢰성을 상처내지 못하자 일본은 엉뚱하게 문안 조정을 위한 한·일 간 ‘협의’를 부각시켰다. 마치 정치적 타협이라도 한 듯 폄하했지만, 보고서에도 나왔듯이 이는 일본 측이 요구한 대로 한국 정부가 최소한의 의견을 개진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국제적·외교적 관례로도 충분히 용인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정치적 타협이 있었던 것처럼 떠벌렸던 일본이 뻘쭘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자 일본은 비공개키로 했던 외교문서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고, 악의적으로 편집해 최소한의 신뢰도 무너뜨렸다. 외교부 관계자는 “당시 일본 정부는 피해자 증언 청취 기회를 만들어 줘서 우리 정부에 고맙다는 뜻을 전했고, 이를 토대로 담화를 작성하겠다고까지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이런 내용은 누락됐다. 정부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하는 권위 있는 국내외 자료 공개를 검토하고, 23일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 등을 불러 정식으로 항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 정부도 “우리는 고노 담화를 지지(계승)한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주목한다”(젠 사키 국무부 대변인)고 말하고 있다. “고노 담화 수정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게 국제사회가 일본에 보내는 경고인 셈이다. 당초 고노 담화의 검증 운운할 때도 그랬지만 검증 보고서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더 큰 것을 잃게 됐다.

일러스트=강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