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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9)-재일한국거류민단(제67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 16혁명후 민단에는 소위 반혁명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쳐 큰 진통을 겪게 되었다.
내가 박정희최고회의부의장을 만나고 일본에 돌아오자 평소 나에게 반감을 품고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반혁명·반정부의 구호아래 민단집행부 타도를 외치면서 들고 일어났다. 이들 반혁명파의 중심세력은 정찬진·정인석·조령주·이유천·오자영·김재화 등 민단중앙본부의 고문들이었다.
반혁명운동을 하는 사람가운데는 민단안에서 나와 대립하고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지만, 소위 순수한 민주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심지어 조총련의「프락치」까지 있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5·16혁명을 비방하고 나를 욕하다가 이른바 조용수사건을 계기로 해서 더욱 맹렬한 기세로 나왔다.
조용수사건이란 민단「도찌기껜」(석목현)사무국장을 지낸 조용수가 4·19후에 본국에서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용공적인 논조를 펴다 5·16혁명후 체포된 사건이다.
조는 8·15해방후 일본에 밀항하여 재판에 계류중이던 것을 내가 변호해서 해결해준 일이 있는데 그후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민단간부로 활약했었다.
61년10월20일쯤 김재화 전민단장을 비롯해서 그의 사위인 곽동의·전민단중앙본부 사무총장 배동호·전경도본부단장 김재화·김용원 등은 이른바 민단정상화를 명분으로 내세워「유지간담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속칭「베트콩」파다.
이들에게「베트콩」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표면적으로는 민단활동을 하면서 기실은 반민병·반국가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베트콩」파의 배후에는 비록 나중에 이해가 엇갈려 이탈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이납원·김금석 등도 가담하고 있었다.
「베트콩」파가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가면서 민단은 심각한 분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61년 12월 13일 민단산하 학생단체인 한국학생동맹(한학동)이 민단집행부 지지파와 유지간담회측으로 갈려 임시총회가 유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나는 한학동대표위원 이상희를 정권처분하고 한학동을 민단직할로 하여 분열을 수습했다. 이러한 조치로 해서 한학동의 활동은 일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학동보다 더 곤란했던 것은 곽동의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청연동맹의 활동이었다.
한청은 유지간담회의 선봉역으로 횡포가 자심하여 민단집행부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한청본부를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사태를 더 이장 방관할 수 없어 조령주와 함께 곽동의를 찾아갔다.
우리는 민단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중지할 것과 대한민국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하나 내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곽은 반성은 커녕 막무가내로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할 수 없이 나는 62년 4월6일 단장직권으로 곽동의에 대해서도 정권처분을 내렸다.
곽의 정권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반집행부운동이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반혁명·반집행부운동에는 조총련이 물심양면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민단원들에게 돈을 뿌리고 향응을 베풀어 선동하는가하면 나를 지지하는 사람을 조총련계 신용조합에서 대부를 해주겠다고 유혹해서 빼내기도 했다.
일본의 정보소식통들이 내게 들려준 얘기로는 조총련은 북괴로부터 반혁명·반권일운동을 철저히 전개하라는 지령을 받고 있었다.
북괴는 5·16혁명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이를 민족자주혁명이라고 했다가 곧 태도를 표변했다.
5·16혁명 약 한달후인 6·25란 기념대회에서 조총련의장 한덕수는 5·16혁명을 소위 반동혁명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혁명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내가 온갖 반혁명·반집행부세력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온건한 실업가들과 혁명을 지지한 민단원들의 덕택이다. 특히 허필석(동경상은신용조합이사장)·범전규(재일·실업가)·신격호(「롯데」사장) 씨 등은 재정난에 허덕이는 민단집행부를 위해「재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민단은 아마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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