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 70여 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0호 05면

파푸아뉴기니에서 지난 13일 치러진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제에서 유족 박낙순씨가 제례를 갖추고 있다. 제단에 청년 모습인 그의 부친 영정이 놓여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이날 제막된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추모탑. 한국 정부가 3억2000만원을 들여 세웠다. 이상언 기자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72년의 세월이 ….”

파푸아뉴기니서 치른 일제 징용 희생자 추모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가는 손정순(71)씨의 목이 메였다. “처음으로 한 번 크게 불러보겠습니다. 아버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다른 이들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파푸아뉴기니의 북동부 도시 코포포에서 지난 13일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추모탑’ 제막식과 함께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6m 높이의 탑 앞 제단에 제수가 차려졌다. 21명의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은 한 사람씩 앞에 나가 절을 하거나 기도를 했다. 모두 아버지 없이 한 세상을 살아온 아픈 역사의 피해자다.

박낙순(73)씨는 한국에서 챙겨온 아버지의 영정을 제단에 올려놓았다. 영정의 인물은 까까머리 청년이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아들은 노인이다. 그 역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외쳤다. 그의 부친은 1941년 강제로 군에 끌려가 3년 뒤 추모비가 세워진 곳의 인근 지역에서 숨졌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이 가지고 온 영정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아버님, 저승에서 어머니 만나셨습니까. 이제 편히 쉬십시오.”

잇따라 제단 앞에 나온 유족들은 마치 부친을 상봉한 듯 다정하게 인사했다. 그간 살아온 여정을 소상히 보고하는 이도 있었다.

참가 지원자 중 추첨에서 뽑혀 온 이들은 모두 파푸아뉴기니 땅을 처음 밟아봤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직항 항공편도 없는 남태평양의 섬나라에 날아오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총리실 산하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가 추모탑 건립에 맞춰 초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푸아뉴기니는 태평양전쟁 때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숨진 나라다. 정부의 연구 보고서 ‘태평양전쟁기 격전지와 조선인 희생자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4410명이 노무자나 군인으로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4076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은 42년 파푸아뉴기니 북동부 지역에 상륙했다. 당시 이 나라는 호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본군은 수도인 포트모레비스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중간의 산악 지대를 사이에 두고 미군호주군이 주축인 연합군과 대치했다. 일본은 이 나라 전체를 점령한 뒤 호주까지 침략하려는 야욕을 보였고, 미국과 호주는 결사적으로 저지했다.

미군은 폭격으로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작전을 주로 구사했다. 그 바람에 아사(餓死)가 속출했다. 말라리아와 장염 등 풍토병으로 숨진 이도 많았다. 연합군에 생포된 이들은 오히려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식량 보급이 끊겨 원숭이를 잡아 먹으며 버티기도 했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일을 수없이 겪었다. 연합군의 공격에 쫓긴 일본군은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을 산악 지대에 버려두고 가기도 했다. 일본군은 44년 호주군의 진격으로 패퇴를 거듭하게 되자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을 계속 보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 희생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당시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미혼자가 많았으나 기혼자도 꽤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놓고 집을 나서거나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놓은 이도 많았다. 2세가 잉태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역만리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된 이도 있다. 추모식에 참석한 21명의 희생자 자녀 중 절반 정도가 유복자였다. 그들 중에는 남겨진 사진조차 없어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들고 온 영정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정무호(71)씨는 아버지의 제삿날을 두 번이나 바꾼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철도 역무원이었던 그의 부친은 42년 일본군으로 동원됐다. “아들이 다섯이나 있는 집에서 하나쯤은 군대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관청 직원의 겁박이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해방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엔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며 제사 지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다 66년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자 집안 어른들의 고집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부친 생일을 기일로 삼았다. 그러다가 문중 어른이 “이런 경우는 집 나간 날을 사망일로 보는 것”이라고 해 제삿날을 바꿨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2000년 국가기록원이 보유 중인 일본 문서를 통해 부친의 사망일을 확인하고 다시 날을 바꿨다. 그때 파푸아뉴기니 북부 웨와크 지역에서 부친이 숨을 거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추모제에 참석한 21명의 희생자 자녀는 대부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남편 잃은 어머니들은 개가하지 않고 어렵게 아이를 키웠다. 남편이 일본군에 속해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집안으로 몰리기도 했다. 가장의 노동력이 주요 생산 수단이었던 시절, 아버지 없는 집은 가난을 피하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기가 죽기도 했다. 정씨는 “‘호로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뭐든 더욱 조심해야 하는 서글픈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추모제 뒤 일본군이 대포나 군함 등의 무기를 감춰두기 위해 산악지대에 파 놓은 땅굴을 돌아봤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이런 굴을 파다가 굶어죽었어.” 한 유족이 서럽게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