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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품 외국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서너 시간이면 해결되는 대구∼서울간의 나들이가 웬일인시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아침일찍 떠났다가 저녁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하루의 거리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핑계가 있게마련이다. 학기중에는 강의때문에, 방학중에는 무슨 밀려 쌓인 원고와 독서 등등으로 말이다. 걸상과 책상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서생의 신세가 되어서라고나 할까보다.
더구나 요사이 나는 대학교안에 마련된 교수사택의 신세를 지고있는 형편이라 집에서 연구실, 그리고 강의실을 내왕하는 것이 고작이다. 아마 20년가까이 보낸 서양의 나그네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의 품에 안긴 평안함에서 온것인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대학이라는 상아탑속에 메몰되어가는 기분이다. 「사문불출」문자 그대로다.
며칠전 서울에서 있었던 실화의 한토막이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었다. 급한 볼일이있어 갔다. 상경한 김에 옛 은사를찾아 뵙기로했다. 마침 선배도있어 함께 자리를 마련했다. 은사의 안내로 종로 뒷골목의 아늑한<사슴>이란 곳으로 인도되었다. 낮익은 몇몇 친구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쌓였던 회포를 풀면서 종횡무진하게 담소는 짙어갔다. 화목한 분위기는 스승과 제자와 술이 함께하여 더욱 흥겨웠다. 오손도손 오가던 새해의<이바구>는 제담의 극치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리라. 난데없이 별로 취해보이지도 않은 멀끔하게 차린 중년신사가 우리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돋보기 안경너머로 굽어보면서 불쑥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아 유 스트렌저?』 (당신은 의국인이요?)
취했다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발음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고 두러번거렸으나 바로 우리를 가리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동석했던 선배와 나는 긴수염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마 이것이 중년신사의 판단을 흐리게하여 우리를 이방인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모시고 갔던 노은사는 크게 하면서 『예 이놈! 여기가 미국인줄 알았느냐? 영어는 무슨 영어야! 우리는 서울에 있는 한국사람들이야! 도대체 너는 어느나라 사람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중년신사는 말뚝처럼 굳어졌다. 몸둘바를 모르고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기를 『사실 저는 서울 모대학 교수입니다. 두분의 모습이 외국사람 같아서요….』
말문도 채맺지도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은사는 더욱 분노하면서 『야, 국립대학교수는 영어만 쓰는 놈이냐? 국산품외국인이 한국교수란 말이냐!』
모처럼 마련했던 새해의 담소자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거나하게 취했던 홍취는 삽시간에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따위<국산품외국인>교수가 기미년에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으면 얼마나 좋으랴!
▲약력=34년 서울출생·연세대경제과졸·서울대대학원수학·「프랑스」「툴루즈」대학·「파리」대학졸·「파리」제10대학교수·일본동경대교환교수·현재계명대학철학교수·철학박사·신학박사
▲저서=『도와 로그스』(불문),『아버지와 아들』(불문),『도덕경』『효경』등 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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