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겨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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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세살배긴 만삭으로 배가 불룩한
엄마가 업고
네살배긴 열 한살의 맏이가
업고
여섯살. 여덟살, 아홉 살, 세 꼬마는
등에 손에 저마다 봇짐을 메고 들고
엄동설한의 때로는 빗발같은
포탄을 피하면서
벌써 몇 날 몇 밤째인가를
앞뒤 좌우 옆으로
그득 그득 늘어선 피난민의 대열.
-엄마, 다리 아파, 아직두 한참 더 가야돼?
-이제 거의 다 왔다. 저어기 보이는
저 고개 있지? 그 고갤 하나만
더 넘으면 돼.
춥고, 배고프고, 다리가 아프고 발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마비되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
고만 싶은 것을, 이제 한 고개만
더 넘으면 된다는 엄마의 말에,
올망졸망 여섯 아이들은 불쑥
기운이 나서 다시금 걸음걸음
힘겹게 피난길을 갑니다.
땡땡 얼어터진 발가락들이
눈길에 푹푹 빠져가면서
한 고개를 넘고 또 한 고갤 넘어도
아직도 보이지 않는 그 곳을
이번에야 틀림없겠지
이번에야 틀림없겠지
엄마가 하시는 말만 꼬옥 믿고서
고꾸라질듯 고꾸라질듯
드디어 마지막 고개를 넘어섭니다.

<안혜초>

<시의 주변>
『어머니는 강하다』는데 왜 이리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느끼곤 하게 될까.
1951년 1·4후퇴 당시 피난길에서의 그 강인하던 어머님의 모습. 속고 또 속아도 끝끝내믿게만 되어지던 어머님의 그「절실한 거짓말」의 힘, 사랑과 믿음의 승리.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사랑해야지. 꿈을 잃지 말아야지, 강해져야지.

<이력> ▲서울출생 ▲이화여대 영문과졸업 ▲67넌「현대문학」추천「데뷔」 ▲75년 시집 『귤·레몬·탱자』출간 ▲서울신문, 경향신문등 기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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