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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기름손' 아킨페예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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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2의 야신(러시아 전설의 골키퍼)’이라는 이고리 아킨페예프(28·CSKA모스크바)가 무너졌다. 덕분에 한국 축구가 살아났다.  아킨페예프는 18일(한국시간) 한국-러시아의 H조 1차전에서 후반 23분, 이근호(29·상주 상무)의 중거리 슛을 놓쳤다. 정면으로 날아온 볼을 뒤로 흘려 골이 됐다. 그를 방해하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지만 혼자 넘어졌다. 보고도 믿기 힘든 골. 국내 팬들은 ‘기름손’이라며 아킨페예프를 비아냥댔다.

 아킨페예프가 이런 놀림을 받을 선수는 아니다. 키 1m86㎝로 골키퍼로서 그리 크지 않지만 탁월한 순발력을 자랑한다. 17세 때 CSKA 모스크바 주전 골키퍼가 된 그는 12년째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며 10시즌 동안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브라질 월드컵 유럽예선 10경기에서 5실점만 하며 러시아를 본선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다.

 그는 이적시장이 열릴 때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 등 유럽의 명문 클럽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독일의 이적료 평가 사이트 트랜스퍼마르크트에 따르면 아킨페예프의 시장가치는 2000만 유로(약 277억원)로 러시아 선수들 중 가장 높다.

 커리어는 분명 최고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다.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2007년과 2012년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 경기력에 기복이 생겼다. 볼 핸들링이 불안해져 유로2012 때 러시아 사령탑을 맡았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를 주전으로 쓰지 않았다.

 본지 해설위원인 이운재(41) 23세 이하 대표팀 골키퍼 코치는 “실점하기 전에도 아킨페예프가 두세 차례 볼을 놓치는 장면이 나왔다. 최고의 골키퍼도 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A매치만 70경기를 치른 베테랑 아킨페예프에게도 첫 월드컵이다. 긴장한 나머지 몸이 굳었고, 작은 실수들이 반복된 끝에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한국 대표팀으로서는 더없는 ‘땡큐골(안정환 본지 해설위원이 만들어낸 유행어)’이었다.

아킨페예프는 경기 후 “어린애 같은 실수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러시아 카펠로 감독은 “실수를 용납해야 한다”며 격려했다.

윤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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