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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때 과거사 청산 못한 게 갈등 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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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제 화해합시다.”(양유찬 한국 수석대표)

 “도대체 무엇을 화해하자는 말입니까?”(이구치 사다오 일본 수석대표)

 1951년 10월 20일 1차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당시를 기억하는 유진오 선생이 본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1983년 9월 26일자)에서 밝힌 한·일회담의 모습이다. 한·일 간의 과거사 인식 차는 이처럼 극명했고 6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은 한국의 요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한·일 갈등의 근원과 해법을 모색하는 학술회의가 한국 정치학회와 해위학술연구원 주최로 1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해위 윤보선과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주제로 열린 회의에서는 협정의 배경과 목적,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토론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65년 한·일협정에서 안보·경제논리에 치우쳐 일본의 한반도 강점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는 등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일본 딜레마’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일본이 35년간 조선 지배가 합법 통치라는 인식을 하는 데 반해 한국은 무력 강점으로 불법이라는 인식하에 회담에 응했다”며 “과거사 인식의 괴리 문제는 지금까지 한·일관계를 마찰과 대립의 악순환으로 이끄는 최대 아킬레스건”이라고 말했다.

 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51년부터 14년간 1500차례 열린 실무 회담이 바탕이 됐다. 회담 초·중반까지 한국은 ▶일본의 역사 과오 인정 ▶일제 강탈 재산 청구권 ▶평화선과 어민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한·일병합 조약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대일 배상요구를 강하게 주장했다. 특히 3차 한·일회담에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 수석대표가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줬다”며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며 이른바 ‘구보다 망언’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리 측 홍진기 대표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다면 한국인이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지만 일본의 입장은 완고했고 회담은 4년반이나 중단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들어 미국의 원조 축소와 정치적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경제 재건의 방안으로 한·일 수교를 활용한 것이 오히려 문제를 낳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교수는 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의 비밀회담, 일명 ‘김-오히라 메모’를 언급하며 “10년간 끌어오던 수교회담이 3시간 만에 잠정적으로 타결된 것으로 3억 달러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받는 대신 개별청구권 등 모든 대일청구권을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김학준 해위학술연구원장도 “당시 한·일협상은 평화선 삭제, 사할린 교포 귀환 문제 배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배제, 독도 관련 언급 배제, 남북통일의 가능성을 줄인 굴욕외교”라며 “일제 식민지 착취에 대한 사죄와 정신적·물질적 배상 등 본질적 문제는 외곽으로 내쫓긴 채 경제 협력만 중시됐다”고 말했다.

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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