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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축구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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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뉴욕타임스가 브라질 월드컵에 진출한 19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눈길을 끈 건 ‘Which Team are you rooting against?’라고 묻는 둘째 질문이었다. 직역하면 ‘상대팀을 응원하고 싶은 팀은?’쯤 되겠다. 즉, 월드컵에서 지기를 원하는 국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한국은 당연히(?) 일본을 꼽았고, 일본도 질세라 한국이라고 답했다.

 내가 눈여겨본 건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뉴욕타임스는 패배를 바라는, 다시 말해 저주하는 나라를 물었다. 이는 스포츠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민족과 정치에 관한 질문이다. 하나 축구에서라면 가능할 수 있다. 축구는 축구 너머의 것이어서다. 혹 지구가 둥근 이유를 아시는가? 독일의 한 언론이 명쾌한 답을 내렸다. 신이 축구 팬이었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는 명제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와 유사한 착각이다. 축구는 한 번도 축구일 뿐인 적이 없었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월드컵 예선전 17일 뒤 전쟁을 벌였다. 엘살바도르가 경기에서 이기자 온두라스는 외교를 단절했고, 엘살바도르가 침공했다. 이 전쟁으로 약 4000명이 죽었다.

 축구가 전쟁을 멈춘 일도 있었다. 코트디부아르가 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진출한 2006년 주장 디디에 드로그바가 TV에 나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주일만이라도 전쟁을 멈춰주세요.” 이듬해 정부군과 반군은 5년을 끌어오던 내전을 끝냈다.

 이달 5일 현재 대한민국의 FIFA 랭킹은 57위다. 브라질 월드컵에 진출한 32개국 중에서 호주(62위) 다음으로 낮다. 한국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카보베르데(Cabo Verde) 제도(39위)보다 랭킹이 낮다. 그런데도 우리는 러시아(19위)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믿는다. 축구는 응원하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어서다.

 하여 축구에선 실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것이다. “공은 둥글다”며 연신 주문을 걸고, 골대를 한참 벗어난 소위 ‘똥볼’을 보고도 “아깝게 빗나갔습니다!” 탄식하는 것이다. 붉은 의복 갖춰 입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집단제의를 치르는 것이다.

 이 글에는 시차가 있다. 승패를 모르고 쓴 글이 승패가 난 뒤에 읽힐 가능성이 크다. 하여 영어의 미래완료 시제로 말한다. 한국이 무조건 이겼을 것이다. 근거? 물론 있다. 바로 축구이어서다. 본능과 신앙에 관한 문제이어서다.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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