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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균 식탁' 에 장수비결 숨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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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동서 대륙을 잇는 실크로드 주변에는 세계적인 장수촌이 깔려 있다. 옛 소련의 카프카스,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 파키스탄에 있는 훈자, 중국의 신장과 파마가 그곳이다.

대부분 고원의 분지에 자리잡은 이들 장수촌이 유럽.일본의 장수촌과 다른 점은 현대문명과 완전히 격리돼 왔다는 것. 그러나 '대륙의 섬'으로 남아 있던 이곳도 개방의 물결을 거스르기 힘든 듯 본래의 모습을 서서히 잃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대표적 장수촌인 우즈베키스탄 지작군(郡)의 자밀 마을을 방문해 이들의 장수 비결과 삶을 들여다봤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고도(古都) 사마르칸트를 이어주는 실크로드. 지난달 28일 아침 거친 국도를 차로 덜컹거리며 4시간여를 달리자 톈샨산맥의 끝자락이 나타난다.

초록빛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구릉 곳곳엔 양떼들과 양치기 소년의 모습이 한가롭다. 자밀 마을에서도 가장 장수인이 많다는 샤라프라시드 구역. 3천5백여명의 주민 중 1백세 이상 노인이 6명, 90세 이상은 23명에 이른다.

마을 촌장의 안내로 이스마툴라 이스마한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식구 수를 물으니 증손자까지 33명이란다. 식탁 주위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노인의 '자비롭고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시작되는 감사기도를 경건하게 따라했다.

할아버지에게 나이를 물으니 95세라고 한다. 그러나 식구들은 46세에 낳은 맏아들이 현재 56세이니 1백2세가 정확할 것이라고 정정해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결혼이 늦어졌다고 했다. 부인 구이스노이 할머니와는 15년 차.

이스마툴라 할아버지는 지금도 새벽 동틀녘이면 일어난다. 하루 다섯 번의 살라 의식, 즉 경배(敬拜)를 드리기 위해서다. 그는 지금도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라디오로 이라크 전쟁소식을 들을 정도로 정정하다.

이웃에 사는 마마라히모브 오라잘리 노인도 같은 1백2세. 앞마당까지 나와 기자를 맞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건강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힘차게 괭이질을 해보인다.

텃밭은 2백평은 족히 돼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토마토와 오이.배추를 경작한다. 유실수에서 나오는 과일도 수확해 가계에 보탠다.

인심도 후해 지난해 수확한 홍시와 호두.수말레크(보리 엿기름으로 만든 전통 엿)를 권한다.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은 듯 작별 인사도 '소홀롬 불링(건강하세요)'이다.

◆경건한 삶이 장수를 지탱=의사인 이스마툴라 할아버지의 셋째아들 화이룰라에게 장수 비결을 물어보았다. 먼저 나온 답이 종교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이다.

"평생 빠짐없이 하루 다섯 차례 기도(두아)를 하십니다. 단순하게 주문을 외는 것이 아니라 50번 허리를 숙이고, 20번을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죠. 기도 전 얼굴과 몸을 씻는 절차도 밟지요." 이런 의식은 청결하고 건강한 몸, 그리고 맑은 정신을 이끈다.

적당한 운동량이 있는 데다 규칙적인 생활을 통한 생체리듬의 조화, 그리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도한다는 것.

실제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건강하다는 연구결과는 많다. 종교인들은 우울증이 적고 면역력이 강하며, 혈압도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마마라히모브 할아버지는 기도는 하지 않지만 규칙적인 생활태도는 차이가 없다. 해뜰녘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이 몸에 뱄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두 노인 모두 건강한 혈색과 온화하고 밝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적게 자주 먹고, 토막잠 즐겨=이곳 장수 노인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소식하며, 낙천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에서 여타 장수촌 노인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양젖이나 우유, 그리고 발효유와 치즈의 섭취량은 다른 지역보다 매우 높다.

이스마툴라 할아버지의 식탁을 보자. 유산균 덩어리라고 할 정도로 시큼한 요구르트, 글문드라는 우유 밀떡, 논이라고 불리는 빵, 기름에 볶은 오슈, 야채 샐러드 등이 주 메뉴다.

야채를 걸쭉한 요구르트에 찍어먹거나 요구르트를 그냥 떠먹기도 한다. 글문드는 밀가루 부침개같지만 우유에 푹 젖어 있다. 오슈는 이른바 양고기 볶음밥.

하지만 이곳 특산물인 목화씨 기름으로 볶아 동물지방 함유량은 낮고, 즈라라는 향료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주식인 빵(논)은 통밀을 사용해 구수할 뿐만 아니라 곡물의 섬유질이 풍부하다.

이나마 두 노인 모두 매우 적게 먹는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 대신 틈틈이 호두.건포도.요구르트나 우유 등을 먹고, 기익오트 차를 즐긴다.

촌장인 무라드 살리모프는 "기익오트 차뿐 아니라 향료는 혈압을 내리게 하고, 피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두 노인 다 토막잠을 즐긴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일찍 일어나는 대신 낮에 30분 정도 한두 차례 수면을 취한다.

◆퇴색하는 장수촌=중앙아시아의 장수촌도 개발과 문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장수노인은 있지만 대를 이을 장수인은 없어 보인다. 기자와 동행한 우즈베키스탄 국영방송국의 카말로프 안봐르(41)는 지독한 애연가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1백1세로 지금도 건강하다고 자랑했다. 증조할머니는 96세 때 나무에서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더 오래 사셨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70세에 사망했다. 매우 비만했고 담배를 즐겼으며 그다지 신앙심이 깊지 않았다고 했다.

마마라히모브 할아버지를 소개한 둘째 아들도 매우 비만했고 얼굴이 불콰해 한 눈에도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송국의 안봐르는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흡연인구와 스트레스 급증, 절제하지 않는 생활태도와 기름진 음식(특히 양고기)이 조기사망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타슈켄트=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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