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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5)『원술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50년4월 국립극장 개관기념작품은 유치진 작. 허석·이화삼 연출의 『원술랑』이었다.
『원술낭』은 새로 발족한 「신협」의 첫 연극이기도 하다. 당시 신극 연극계의 제1인자들이 총동원되어 완성한 훌륭한 연극이었다.
허석·이화삼이 공동연출을 해 이채를 띠었으며 배역엔 김유신에 박경왕, 원술에 김동원, 담릉에 주선태, 문무왕에 필자, 문지기에 박제항, 원각대사에 서월영,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에 황정순, 진달래에 김선영, 처사에 박상익 등이었다.
그리고 「스태프」로는 무대감독에 연출을 맡은 허석이 겸했고 효과에 심재동, 조명에 최진, 무대장치에 김정환 등 신극계를 대표하는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원술낭』의 대성공은 이러한 연극인들의 조화 있는 창작의 멋진 결과였다.
『원술낭』에 참여했던 연극인 가운데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문지기 역을 맡았던 박제항은 노역전문이었다. 「토월회」출신의 박제항은 젊었을 때부터 노역만을 해 그의 참 얼굴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주역에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던 명배우였다. 그는 참으로 성실한 연기자로 신파극 『춘향전』의 허봉사 역을 맡았을 땐 직접 장님을 찾아가 굿거리 하는 것을 배워 무대에 섰는데 이 때문에 『춘향전』 의 허봉사 역은 그를 따를 배우가 없었다.
그에겐 이런「에피소드」가 있었다.
「토월회」시절 첫 처녀출연 때였다. 막이 내리고 무대 뒤로 나왔을 때 그의 선배 이백수가 다가와 느닷없이 뺨을 갈겼다.
『그것을 연기라고 해. 너 때문에 연극 전체가 엉망이 돼 버렸잖아.』 그때 이백수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던지 그만 고막이 찢어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 귀가 먼 박제항은 남보다 두 배나 더 노력을 해야만 했다.
연극을 할 때면 후견인이란 것이 있다. 막 뒤에서 대본을 읽어주는 역할이다. 대부분의 연기자들이 후견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귀가 먼 박제항은 후견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본을 완전히 외어야했다. 이것은 한가지 예이지만 아무튼 그가 연극에 임하는 자세는 참으로 열성적이었고 성실했다. 그는 6·25사변 중 납북되어 고인이 됐다는 소문이다.
박경왕는 「극협」의 빚을 갚느라 마지막까지 고생하다 「신협」의 전속배우가 됐다. 『원술랑』에선 김유신의 적역을 맡아 역사적인 인물상을 잘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원술랑』의 배역 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이가 박상익이다. 박상익은 처사란 단역을 맡았었다.
왕이 위독했을 때 약을 가져가 『대왕, 이 약을 드시면 쾌유하실 겁니다』하는 대사와 함께 한 장면에만 잠시 나오는 역이었다.
이런 역이었으니 박상익은 단단히 화가 났었다. 그래 『이게 뭐냐』고 따졌으나 정해진 배역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나. 첫날 첫 회 공연을 끝내고 보니 공연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그만 박상익이 등장하는 부분을 생략하기로 했다.
결국 단역이라 불평했던 것이 그나마 그 장면마저 잘려나가 버렸으니 배역마저 없어져버린 셈이었다.
필자는 문무왕 역이었는데 마지막 막 (전체가 5막7장)에만 등장하는 역이었다. 그래서 4막까지는 줄곧 객석에서 구경만 했다.
그런데 극중 나이 18세의 진달래 역을 맡은 김선영의 연기가 아무래도 어색했다. 40세 가까운 김선영이 18세의 깜찍한 처녀 역을 맡아 아양을 떠는 모습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이에 반해 나이 어린 황정순이 극중 나이 65세의 지소부인 역을 맡았으니 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 배역이었다.
특히 여성연기자의 제 나이를 무시한 배역은 신파극 때부터 내려오는 폐습이었다. 젊은 연구생이 들어오면 다짜고짜로 노역부터 시키고 나이가 들고 노련해지면 다시 처녀 역을 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막상 객석에서 그들의 연기를 보니 이 습관이 과연 정당한가 하고 불만스럽게 여겨졌다.
아무튼 『원술랑』은 대성공이었다.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오랜만에 안정된 무대에서 연극을 하자니 신바람이 났고, 관객들도 호화무대에 갈채를 보냈으니 이 연극이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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