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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윤정 엄마.
또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집을 보는 어린것을 죽이고 물건을 훔쳐간 끔찍한 살인강도사건이 벌어졌군요. 정말 아무 일 없이 살아있다는 게 이상할 만큼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 날 석간 3면, 가슴을 섬찟하게 하던 검은 색 표제의 5단 잠실「아파트」강도 기사의 장본인이 어쩌면 이 수많은 서울인구 중에서 윤정이 집일 수가 있었을까요? 하루가 꼬박 지난 후 전선을 통해 윤정 엄마의 떨리는 음성을 들었을 때, 나는 참으로 착잡한 심경이 되어 미안하고 또 미안할 수밖에 없었지요.
열 일을 제쳐두고 뛰어가 두근거려 못살겠다는 그 가슴을 진정시켜 주어야 할 내가 겨우 전화로만 위안을 줄 수밖에 없었음은 도시의 비정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무거운 잡다한 일상사에 시달리는 때문이 아닐까요? 강도사건, 특히 죄 없는 어린것을 살해하고 물건을 훔쳐 가는 살인강도사건이 주부들이 집을 비운사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별일 없이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니는 주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주부가 강도를 막기 위해 집만을 지키고 앉아있을 수 있는 현실인가요? 따로 살고는 있어도 시집식구의 생일 챙기랴, 남편 심부름으로 동회 오가랴. 학교의 학부형회의에 참가하랴, 동창계까지도, 주위에 예의 갖추고 함께 어울려 살려면 밖에 나가 해야할 일이 하고많은 형편입니다. 집안 일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친구와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가슴을 적실 수 있는 여유도 갖고 싶지요.
여편네가 집구석 지키지 않아서 강도사건이 거듭 잔인해진다면 하루라도 빨리 온갖 문명을 거두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옆집에서 어린것이 숨져가도 모르는 세상, 강도의 흉기를 맞고 피를 흘리는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를 못본채 하는 인심, 내방 벽 옆에서 불길이 치솟아도 내집 문고리만 단단히 휘어잡는 「아파트」촌의 단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윤정 엄마.
어제 또 수정「아파트」사건으로 얼마나 가슴 떨고 불면의 밤을 보냈어요? 기막히고 눈감아 버렸으면 좋을 만큼 끔찍한 사건들 때문에 밖에 나와 일해도 문득 문득 집걱정에 가슴이 두근대요. 죄없는 어린것이 연달아 집을 보다 죽어 가는 우리의 현실은 차라리 옛 서부극의 시대를 부럽게조차 합니다.
무법천지였던 서부에서조차 어린이나 여자를 해치는 무법자를 저는 영화 속에서 한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총부리를 겨누어도 어린이와 여인들의 여린 심장은 피하지 않던가요? 그들의 「휴머니즘」이 부러울 뿐입니다.
한시도 이처럼 맘놓을 수 없는 세상, 이런 세상 아니던 우리 어린 시절, 아무 두려움 없이 이웃과 사귀고 배고픈 듯 헐벗은 듯 살던 세상이 그립습니다.
그 때는 공기는 맑았고 하늘은 높아 우리의 뺨은 붉고 팽팽했었고 옆집 앞집은 물론 먼 동네 산동네까지 터놓고 지내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인정어린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다시 만들어 줄 수는 없겠지요.
이제는 동창계도, 동네친구와의 다모임도 그만 두어야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주부가 지켜야 할 영역인 가정을 다시 철저히 지켜야할 것 같습니다. 어린것을 우리가 보호해야 하니까요.
윤정 엄마.
어린 강도가 서투른 솜씨로만 그쳐버린 윤정이네 그 날 사건은 확실히 하늘이 도운 겁니다. 어린것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니 얼마나 다행이지요.
무섭고 떨리는 가슴을 오직 하느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윤정 엄마의 심정에 깊은 이해를 보냅니다. 현실은 참으로 그렇게 밖에 어쩔 도리가 없음을 한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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