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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경제성장은 강박관념 아닌 선택의 문제로 접근할 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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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거니와, 이에 대한 뉴스와 논평은 중앙일보를 비롯해 우리나라 매체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격차 문제다.

두 개의 길, 사회와 개인의 결단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경쟁이 심한 사회체제라고 하겠지만, 적절한 범위 안에서 부를 나누어 가지게 하는 체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론의 효시가 되는 애덤 스미스의 책 제목 『국부론(國富論)』 자체가 그러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을 유명해지게 한 ‘조수(潮水)가 들어오면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모두 뜨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생각은 정책적 대안이 없이 경제를 시장에 맡겨둔다면 부는 한쪽으로 치우쳐 쌓이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시대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지만, 1970년대 이후에 심화된 이 차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보다도 예민하게 여러 사람에 의해 문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다음에 나온 비판들에 답하면서, 피케티는 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 결정론자는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의 저서 제목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파국에 이르거나 혁명적 전환의 시점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변증법을 다시 증명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커져가는 빈부 격차를 말하면서도 대책들을 내놓는 것은 그것을 시정 불가능한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여러 논평에서 피케티의 업적을 극찬했다. 오늘날에 있어서의 빈부 차의 심화는 경제학자들도 알고 있고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연구만큼 포괄적으로 또 철저하게 이 문제를 파헤친 책은 찾기 어렵다고 그는 말한다. 서방의 여러 나라의 자료를 18세기, 19세기까지 밀어올려 조사하고, 다른 연구들의 단편적인 소득 비교를 넘어 소득과 자본과 자산의 수익을 아울러 총체적으로 살펴본 점이 이 책을 결정적인 경제학 연구의 대작이 되게 한다고 한다. 한 서평에서 사용한 그의 표현으로, 이 책은 “경제성장,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 분배, 개인들 간의 부의 분배를 하나의 틀에 총괄하는, 불평등의 통일장(統一場) 이론”이다.

피케티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도 적지 않다. 그것들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통계가 정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위해 과장·선택·변형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파이낸셜타임스의 크리스 자일스의 비평이 대표적이다). 크루그먼도 피케티의 진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분적인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방대한 자료를 다루는 까닭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전체적인 테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피케티의 견해에 거의 전적인 동의를 표현한다.

자세한 내용은 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부의 불평등에 대한 대책에서도 두 경제학자는 의견을 같이한다. 대책은 누진세율을 엄격하게 적용해 소득에 한계를 두게 하고 여러 방법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시도하는 것이다. 과대한 연봉의 문제에 대한 대책은 이러한 정책의 한 예시가 될 것이다. 1980년대 이전의 부가 자본과 자산에 근거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에 있어서 그에 못지않은 것이 기업, 특히 금융기업 간부들의 엄청난 연봉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이 세금에 의해 깎여 나간다면 이 고액 소득자들도 사회적인 비판을 무릅쓰면서 고액 연봉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물음을 하나 묻는다면, 빈부 차의 심화가 왜 문제가 되는가? 이번 논쟁과 관련해 빈부 차를 문제삼는 동기는 시기심이라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이 내놓는 하나의 답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한 동기에서 나온 주장들이 경제를 북돋우고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를 후퇴하게 한다는 비판이다. 피케티나 크루그먼은 과도한 빈부 격차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소수자에게 부가 편중되면 정치에 있어 그 영향이 커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없다.

또 하나 문제는 피케티가 말하는 부가 상속되는 부라는 점에 관계된다. 자본주의의 신화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세습 자본주의’는 능력에 따른 보상의 공정성을 파괴한다. 극단적인 경우 편중된 부는 빈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단순히 민주주의 또는 정치의 문제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 두 경제학자는 대체로 선진국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의 빈곤에 대해 크게 주의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정한 정도 이상의 빈부의 차는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시움의 피케티’라는 글에는 흥미 있는 우화적(寓話的) 이미지가 나와 있다. 이 글의 필자 존 페퍼는 한국의 남북관계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성공회대학에서 가르친 일도 있는 워싱턴 소재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연구원이다. 그는 피케티의 책을 책방에 가서 사볼 생각이었는데, 너무나 잘 팔려서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피케티의 주제를 다룬다.

제목에 들어 있는 엘리시움은 근년에 출시된 영화의 제목이다. 엘리시움은 물론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사후에 가는 극락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구의 부자들이 지구의 모든 부를 모아 우주 공간에 만들어 놓은 인공 낙원이다. 이 사치와 기술의 낙원은 공기 오염이나 기후변화의 문제도 최신의 기술로 해결해 주민들은 여기에서 거의 영생을 누린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인공의 낙원을 뒷바라지하는 지구는 질병과 감옥과 규제 없는 공장으로 가득한 빈곤의 제3 세계다. 지구의 빈민들이 세 대의 셔틀을 타고 엘리시움에 침입해 온다. 그러나 두 대는 포에 맞아 추락하고 한 대가 안착하는데, 거기에 타고 있던 모녀가 호화주택에 숨어들어 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던 딸은 마술 기계의 힘으로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나 이들 모녀는 곧 체포된다. 영화는 우여곡절을 거쳐 지구인(地球人) 모두가 엘리시움의 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존 페퍼의 글이 이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지구와 엘리지움의 격차가 미국의 사회상에 대한 비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피케티론(論)에 추가해 또 하나의 흥미로운, 그리고 더 심오하다면 심오한 반응은 어떤 피케티 논쟁에 첨부된 댓글 한 편에 들어 있다. 이 댓글의 필자는 피케티와 그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전부 경제성장에 관계된다고 하고, 그 때문에 경제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누가 금 덩어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부의 경쟁은 삶의 참다운 보람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경쟁에는 “로맨스도, 기쁨도, 창조성도 없고, 삶에 대한 찬가(讚歌)도 없다”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필자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레드록(赤岩) 사막 지대’에 산다. 그가 즐기는 것은 자전거 타기, 화수(花樹) 가꾸기, 그리고 실험 삼아 해보는 이런저런 일들이다. 사는 집은 화수 사이에 있는 오막살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필자는 그 생활수단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 나름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이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는 있다. 그의 주변에 널려 있는 미국 남서부의 광활한 땅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부귀영화를 버리고 사막 가운데 작은 집을 마련해 사는 결심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세속을 버리는 금욕의 결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찾은 것은 번거로운 세속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진정한 삶의 기쁨이다. 그런데 ‘소은어야 대은어시(小隱於野 大隱於市)’ 즉, 작은 은자는 들에 숨고 큰 은자는 시중에 숨는다는 말이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환경적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한 것과 같은 자기 충족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빈부 격차의 문제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그것을 적절하게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도 정신 건강-개인적인 정신 건강, 그리고 사회적인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성장도 강박관념이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이것은 비단 경제 문제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의 수사(修辭)는 모든 잘잘못을 전적으로 사회에서 찾는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에 있는 것으로 말해진다. 윤리와 도덕은 사회적 제도에 관계됨으로써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결단에 연결됨으로써만 참다운 인간적 덕성이 된다. 사회에서 윤리 도덕의 기초가 무너졌다는 느낌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가 바른 윤리의 기초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일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도덕적 결단은 쉽지는 않으면서도 어느 때나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크게 떠오르게 된 빈부 격차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그 문제에서나, 다른 사회 문제들에서나 해결에는 큰 길 이외에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큰 길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사회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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