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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소리」제60화 황촌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렸을 때 기억가운데 상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몇가지 있다. 나는 겨우 말을 배울 무렵부터 우리 아버지를 가장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특별히 엄하신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세상에서 아버지만큼 높은 어른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모를 일이 생겼다.
제일 높다고 믿었던 아버지가 목사님 앞에서는 꼼짝 못하셨다. 선교사 일행이 우리동네로 전도하러 나오면 으레 우리집 사랑채에서 묵었다. 「캐나다」선교사는 마차를 타고 올때도 있었고 나귀를 타고 오기도 했다. 한국인 전도부인과 전속 요리사도 함께 왔다.
선교사 일행이 우리 집에 당도하면 아버지는 황급히 나가서『목사님, 멀리 오셨읍니다』라면서 공손히 절을 올렸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분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서양 선교사를 존경하게 됐고 나도 자라면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번은 선교사가 나더러 『너는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서슴없이『목사님』이라고 대답했다. 누가 물어도 목사가 되겠다는 대답을 하곤 했다. 선교사를 따라 나온 전도부인은 평양에 집이 있다고 했다. 그 부인은 어린 내가 귀여웠던지 『너는 이담에 어디로 장가를 들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별 생각도 없이 『평양』이라고 대답했는데 어른들은 내말에 모두 웃었다.
그저 무심코 했던 그 말이 이뤄져서 오래 뒤에 나는 목사가 됐고, 또 평양사람과 혼인까지 하게 됐으니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렸을 때의 말이 그대로 이뤄진 것도 신기하려니와, 내가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이뤄지고 보니 하나님의 뜻으로 돌릴 수밖에 없겠다.
나는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웠다. 그때만 해도 악보나 「오르간」같은 것이 없이 그저 입으로 따라 불렀기 때문에 음정이 맞지도 앉았다. 그래도 형들이나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을 곧잘 따라 불렀고, 가사도 금방 볼수 있었다. 형들은 나에게 우국가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깊은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는데 나중에 보니 일제사슬에 얽매인 한민족의 근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가사라도 적어 두어야겠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반만여년 역사국이오 오백여년 독립국으로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독립만세 장한 소리에 동해가 변해 육지되리라』어린 우리들은 애국가와 함께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나는 6세때부터 교회에서 세운 소학교에서 조선어 독본 첫 권으로 한글을 배웠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은 『가마·나비·다리·농부가 밭을 가오』식으로 한글 낱말과 글월로 되어 있었다.
나는 독본을 첫장부터 마지막까지 줄줄 욀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우리말과 글을 완전히 깨우쳤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리말로 방송도하고 설교도 할 수 있게된 것이다.
소학교때 친구로는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온 김성진박사가 있다. 그는 나와는 달리 공립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두 사람은 곧잘 어울려 다녔다. 그의 선친은 김서규씨로 안변군수를 8년이나 지내신 분이다. 당시만 해도 양반가문으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집안이었고, 김박사도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 이를데 없었다. 내가 일찌기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그는 서울에서 김외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간간이 소식을 전해듣는 처지이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노인이 살기에는 여러가지로 쓸쓸한 나라다.
13세때 소학교를 마친나는 집안 형평상 상급학교 진학을 일단 포기했다. 아버지를 도와 연어잡이도 하고 교회일도 심부름하면서 2년 동안 한문공부를 했다.
나는 총기가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한문공부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다. 논어·맹자·통감 16권을 떼고 대학·명심보감등을 읽었는데 고종황제가 지으셨다는 다음과 같은 귀절은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일성지화 능소만경지신 우구비언 오연평생지덕 신피일누 상은직녀지노 일식삼식 매념농부지고
「별만큼 작은 불이 만경의 나무를 태울수 있고, 반마디 그릇된 말이 평생의 덕을 손해보게도 한다. 한오라기 옷을 입을 때도 직녀의 수고를 생각하고, 세끼밥을 먹을 때도 농부의 노고를 생각해야 하느니』-오늘같은 물질 문명속에 살고있는 여러사람들에게 깨우쳐주고 싶은 귀절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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