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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자를 수술하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닥터 리. 갑자기 내 한쪽 눈이 캄캄하게 하나도 안 보입니다. 한 번 좀 봐주세요.”

2년차 망막의사였던 시절이었다. 진료실로 온 분은 놀랍게도 바로 내 스승님이었다. 외과 과장이었고, 병원장이었으며, 외과 교과서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외과의사였다. 그 분은 매우 점잖았고, 항상 학생들에게도 존대말을 했다. 학생들은 저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동경을 했다.

당시 은퇴는 했지만 그 분은 큰 사자였고, 난 병아리였다. 눈을 검사해 보니 황반변성이었다. 황반변성은 미국과 유럽의 실명 1위 질환이며, 우리나라에서도 60세 이상 실명 1위 질환이다. 선생님의 눈은 황반변성 중에서 최악의 상태인 출혈성 수포망막박리였다.

우리 눈을 카메라에 비유하면 망막이라는 필름이 벽지처럼 발라져 있다. 망막의 중심에는 0.5mm의 노란반점(황반)이 있는데, 내가 보려는 사물의 초점이 맺히는 곳으로 시력을 결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황반변성은 50세 이상에서 황반부에 찌꺼기(드루젠)가 끼는 병이다.

이 찌꺼기는 망막 뒤쪽에 있는 혈관(맥락막)으로부터의 산소 공급을 방해한다. 산소가 부족해진 황반을 살리기 위해서 맥락막으로부터 새로운 임시혈관(신생혈관)이 만들어져서 망막 속으로 뚫고 자란다. 그런데 이 신생혈관은 그 구조가 매우 약해서 쉽게 터져버린다.

망막이란 필름에 피가 얼룩지면서 망막에 있는 시각세포들을 손상해 시력이 소실된다. 출혈성 수포망막박리란 벽지(망막) 뒤에 피가 너무 많이 고여서 눈 속에 벽지가 모두 불룩하게 떨어져버린 상태를 말한다. 황반변성의 가장 나쁜 타입이며, 거의 실명을 하게 된다.

유전과 노화가 중요한 원인이지만 자외선·담배·비타민 부족·콜레스테롤·고혈압 등도 중요한 환반변성의 원인이다. 요즘은 신생혈관을 제거하는 항체주사가 가장 중요한 치료법이지만 주사약 기운이 떨어지면 신생혈관이 다시 자라나는 경우가 많아서 지속적인 주사치료가 필요하다.

“선생님. 치료방법으로 망막 뒤에 고여 있는 피를 제거하는 수술이 있습니다만, 제 경험이 일천하니 제 스승에게 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닥터 리. 그냥 닥터 리가 수술을 해 주세요.”

3번을 고사했지만 결국 수술을 하기로 했다. 전신마취로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먼저 눈 속에 있는 유리처럼 투명한 풀(유리체)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벽지를 크게 절개한 후 벽지 뒤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피딱지들을 떼어 냈고, 고여 있는 피를 빨아냈다.

그런 후 눈 속을 공기로 채우고, 다시 실리콘 기름으로 채웠다. 선생님께는 엎드리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기름이 떠서 눈 뒤쪽의 벽지를 밀어붙이게 된다. 그 상태로 2주 정도 지나면 망막이 다시 붙는다. 수술이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가슴에 힘을 준 병아리가 사자에게 여줬다.

“눈은 좀 좋아졌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닥터 리. 원래 이런 거겠지요? 더 캄캄해졌어요.” 얼른 눈을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검은자(cornea) 안쪽으로 검은 피가 꽉 차있는 게 아닌가? 벽지 뒤에 조금 남아있던,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웠던 피들이 엎드리자 앞쪽으로 나와서 고이게 된 것이다. 눈의 압력도 높아졌다. 이제 내 눈이 캄캄해졌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피가 앞으로 나와서 눈 앞쪽에 꽉 찼습니다. 씻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씻어주세요.” 다시 전신마취로 눈 앞쪽에 고인 피를 제거했다. 수술을 하는 모든 시간동안 매 분 ‘이러다가 선생님의 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앞으로 절대 이 수술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했다.

잠도 설친 다음 날 선생님의 한마디에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그 말은 “닥터 리, 이제 빛은 보여요. 수고 많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망막 뒤에 남아있는 피가 점점 흡수되면서 선생님의 시야는 점점 넓어졌고, 나중에는 큰 사물이 구분됐다.

그 날 이후로 1년에 2~3명 정도 비슷한 환자를 만나게 됐다. 과연 그런 수술을 했을까, 안 했을까? 당연히 했다. 망막의사는 은근과 끈기를 빼면 허수아비니까. 그런 환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수술 경과를 잘 말해 줄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수술을 할 때마다 앞으로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고 그 환자들의 결과를 정리해 보니 생각보다 시야가 넓어졌고, 시력도 괜찮아졌다.

실명한 사람 없이 모든 환자는 적어도 그 눈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한 0.02 이상의 시력을 가졌고, 큰 글씨를 구분하는 환자도 생겼다. 이 결과를 모아서 망막 국제학술지에 보고를 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칭찬들을 심사위원들과 편집장에게 받았다. “황반변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수술한 후 장기적으로 관찰한 최초의 논문이군요. 이런 수술을 꾸준히 해 왔다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중심시력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이 논문 결과를 모든 망막의사들이 한 번 꼭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살신성인의 격려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할 수도 없고, 그 후로도 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진료실에 왔을 때 난 선생님의 눈이 그림 1에 실렸던 그 논문을 헌정했다. 사자는 내 앞에서 환하게 웃었고, 그 신기한 모습에 병아리도 같이 따라 웃었다.

☞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이성진 교수는 안과 전문의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겪었던 안과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눈’과 관련된 이야기로 다양한 칼럼 수백 편을 게재했다. 네이버 ‘황반변성을 극복하는 사람들’ 카페 상담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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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 기자 wismile@schmc.ac.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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