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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에 집착…너무 서둘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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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부가가치세실시 1년의 경험은 아직 완전한 평가를 내리기에 미흡하다. 이 혁신적인 조세제도가 국민의 부담을 얼마나 늘리고 납세풍토를 얼마나 개선하며 생산·투자·윤출·물가 등 국민경제 각 부문에 어떤 파급을 미칠 것인지를 정확히 가름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이 짧은 경험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몇 가지 문제들은 이 세제를 우리 실정에 걸맞지 않게 너무 일찍 서둘렀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영수증·세금계산서 주고받기 단속에 나타난 갖가지 저항과 마찰이 그렇고 인정과세를 둘러싼 납세자들의 고조되는 불편이 또한 그것을 입증한다.
부가세의 본령은, 과학적인 과세자료에 바탕을 둔 근피과세에 있다. 이 본령을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준비과정이 없었던 것이 부가세제 도입의 가장 큰 맹점이었다. 이런 준비는 행정차원의 도상연습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실천적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 준비 없이 조세징수나 세제현대화라는 눈앞의 실재이나 명분에 너무 집착한 결과가 오늘의 갖가지 말썽과 부작용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로 하여금 이 세제의 조기도입을 결심하게 만든 두 측면, 즉 명분으로서의 조세체계 현대화와 실리로써의 조세수입증대가 지난 1년 동안 어느 만큼 실현되었는지는 지금 시점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는 오히려 이 명분과 실익을 뒤로 미루고라도 성급한 도입에서 빚어진 마찰과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 이 세제의 장기적 정착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수증가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규세자들의 가장 큰불만이 획일적인 추계과세에서 비롯되고 있으므로 이부문의 획기적인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
세수집착에서만 벗어난다면 인정과세의 개선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거과세를 내세우고서도 제출된 과세자료를 믿지 않는 현실은 결국 부가세제의 자기모순을 반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그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실질적인 인정과세의 폭을 줄이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단기적으로 세수의 상당한 결함을 감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정과세 완화에 따른 세수 감소는 추계과표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현실에 맞게 다듬어 적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커버」될 수 있다.
지금의 추계과표나 새로 도입한 사후번리과표 또는 표준신고율 등이 모두 납세자들로부터 객관성을 인정 못 받기 때문에 조세마찰이 심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과표의 산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 업종별·규모별 외에도 지역이나 경기동향. 나아가서는 개별사업소의 재무상황 변동까지도 고려에 넣은 객관적 기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항정능력의 한계가 그것을 못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과세자료의 양성화나 근거과세의 확립은 하루 이틀에 기대할 수 없으므로 성급하게 이 세제를 정착시킨다는 생각보다 우선 집행과정의 마찰과 긴장을 완화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세금계산서나 영수증단속도 마찬가지다.
벌금이나 가산세로만 단속하기보다는 실제 거래관행으로 몸에 배도록 여러 제도적 장치를 개발하고 유도하는 장기 목표로 다루어져야할 것이다.
집행과정에서의 이런 문제 외에도 세제자체의 문제가 또 있다. 주로 윤출과 관련된 부문이지만 환급의 혜택이 너무 집중되어 있어 사회적 형평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투자나 윤출 또는 중요산업에 베풀어지고 있는 완전 면세의 혜택을 일부라도 축소한다면 상대적으로 일반 납부자들의 부담이 훨씬 경감될 수 있다.
단일세율로 책정된 기본세율도 외형이나 수익률에 따라 차등화 하는 방안도 공평과세를 증진시킨다는 측면에서 검토될 만하다. 특례과세자의 범위나 적용세율도 세수지향에서만 벗어나면 보다 합리적인 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부가세에 관한 한 「조기」정착은 오히려 느긋한 자세와 여유를 통해서만 거들수 있다는 것이 부가세의 역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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