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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터지기만 하면 여기저기 '위원회' "관피아 일자리 만드는 게 대책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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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금융위원회는 자신들의 퇴직 후 일자리 만들기를 대책이라고 내놓고 있습니다.”

 지난달 1일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실에서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용정보집중기관 설립의 기초가 되는 신용정보이용 및 보호법 개정안을 논의하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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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정보집중기관은 은행연합회·손해보험협회·생명보험협회 등에서 개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신용정보를 한 곳에서 책임 있게 관리하자는 취지에서 신설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기구다. 김 의원은 그러나 다소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그는 “정부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금융위 출신 인사가 수장이 되는 조직을 하나 더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관피아가 자신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마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김 의원 지적에 일리가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동안 뜸했던 금융권 기구 신설 움직임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금융사고가 줄을 이으면서 금융당국은 거의 모든 사안마다 해결책으로 기구 신설을 들고 나왔다.

 현재 신설을 준비 중인 금융권 기구는 신용정보집중기관, 금융보안전담기구, 서민금융총괄기구, 해운보증기구, 금융소비자보호위원회(금소위) 및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 등이다.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금융당국은 예전부터 금융권 위기 상황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오곤 했다. 외환위기 뒤 예금보험공사가 만들어졌고, 2005년 은행 해킹 사태 이후 금융보안연구원이 신설됐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일단 설립되면 어김없이 관피아가 수장 자리나 요직을 대물림했다. 현재 신설 논의가 진행 중인 기구 역시 성격이나 설립 경과를 살펴볼 때 관피아가 점령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다. 자회사 형태로 신용정보집중기관을 거느리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은행연합회는 역대 11명의 역대 회장 중 9명이 관피아 출신이다. 금융보안연구원 역대 회장 4명도 3명의 금감원 출신 인사와 1명의 정치권 출신 인사로 구성돼 있다. 금융보안전담기구의 미래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금소위와 금소원의 경우 아예 금융위원회가 인사권을 행사할 태세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 정부안이 관철될 경우 금융위와 금감원 출신 인사가 수장으로 취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서민금융총괄기구의 경우에도 법적 기구로 설립을 준비 중이라 관료 출신 인사가 지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기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미소금융중앙재단과 신용회복위원회의 경우 모두 민간 출신 인사들이 수장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신설 기구의 필요성이나 적정성 여부와는 별개로 박근혜 대통령의 ‘관피아 척결’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금융위도 이 같은 시선에 부담을 느낀 듯 최근 금융보안전담기구 신설 대신 금융보안연구원을 확대·개편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소위든 서민금융총괄기구든 신설 기구들에 관피아를 집어넣으면 그 즉시 신설 취지가 훼손된다”며 “정부가 기구 설립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면 민간 출신 금융소비자 전문가를 금소위 위원장으로 위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신설 조직은 힘이 없는 만큼 초기에는 전문성과 상급 기관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갖춘 관료 출신 인사가 지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다만 이 경우 조직의 틀만 갖추고 떠나야지 다른 직위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욕심을 부리거나 자리를 대물림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박진석·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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